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8강(마17:9-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 23:04

마태복음 강해 제108(17: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9()

 

변화산상의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에게 묻고 있는 것, “왜 유대교지도자 가운데 히브리정경에 가장 밝은 서기관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가?”(17:9-13)

 

사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 제16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처형 그리고 부활의 일정에 대하여 처음으로 예언한 장소가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적고 있습니다(16:21, 8:27). 그곳은 묘하게도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라고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도시이기도 합니다(16:13). 그러므로 갈릴리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는 제자들의 슬픔과 감격이 교차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제16장은 슬픔과 기쁨, 명암(明暗, 밝음과 어두움)이 엇갈리고 있는 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들게 되면 기쁨의 감격이 어느 틈에 사라지고 슬픔만이 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곧 이루어질 예언의 한 토막을 말씀해주십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16:28).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소망과 용기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처형이 있고 나면 삼일만에 스승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천하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good news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놀라운 변화산상의 변형(變形, transformation)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산 위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고 있습니다(17:1-2).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1:27-28, 9:3-4).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17:3). 그것은 일찍이 하늘로 올리어간 엘리야가(왕하2:11) 다시 나타나고 1,400여년 전에 모압의 산지에서 일생을 마친 모세가(34: 5-6) 이 세상에 임한 천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17:3). 그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는 슬픔이 사라지고 부활의 영광이 그 마음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기쁨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산을 하고 있습니다(17:9). 그때 세 제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이 분명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음성으로 예수님의 말씀만 따르라고 자신들에게 명령까지 해주셨습니다(17:5).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임이 증명이 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 낌새를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그러한 것일까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스승에게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7:10). 그 질문 속에는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실마리가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교지도자들은 엘리야가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아니했기 때문에 메시아도 아직 오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는 논리적인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17:10).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메시아가 되자면 엘리야가 벌써 유대 땅에 왔어야만 하는데 아직 오지 아니했으니 당연히 예수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하는 논리입니다. 구약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을(4:5-6) 원용하고 있는 그들 유대교지도자 특히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의 주장은 백성들에게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메시아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16:14).

둘째로,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1)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옳다는 것입니다. 예언 그대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17:11)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말라기의 예언 그대로 이미 엘리야가 유대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17:12a).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기 위하여 엘리야가 유대 땅에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대우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세상에 다시 온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점에 대하여 벌써 설명을 한 바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이 세상에 메시아를 소개하기 위하여 다시 온 엘리야라는 것입니다(11:14). 당시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가버나움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이 자신을 구하지 아니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행동이 하도 이상하여 제자들을 보내어서 물은 적이 있습니다(11:2-3, 14:3-5). 외세인 헤롯 왕가를 쳐부수고 수감중인 자신을 구하고 있지 않으니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는 세례 요한의 견해입니다. 430년이 지나서 유대 땅에 나타난 선지자 세례 요한마저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원수를 쳐부수는 메시아로만 이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세상의 구원주로 오시는(3:13-18)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정확하게 깨닫고 있는 자가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넷째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11:4-6).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메시아를 소개하기 위하여 다시 온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깨우쳐준 것입니다(11:14). 하지만 제자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라고 하는 예수님의 단서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데 유대교지도자들이야 오죽 영적인 귀머거리이겠습니까? 유대교의 교리가 당시 외세를 적대시하고 있지 아니한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인 로마제국이나 헤롯 왕가까지 용서하고(5:44, 22:21)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외치고 있으니(8:10-13) 나사렛 예수야 말로 유대교의 공공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인 성격을 부인하면서 유대교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를 처형해야만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는 율법학자들이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이 다시 온 엘리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서기관들의 태도는 변화산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과(17:5) 정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변화산상에서 스승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영적으로 경험하게 된 세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 하였도다! 17:12)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닫고 있습니다”(17:13).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세 제자들은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천국의 모습을 보고 나서 비로소 영적으로 듣는 귀가 열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서기관들은 그와 같은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적으로 재앙이며 현실적으로 큰 불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40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유대교도 예루살렘 성전도 모두 유대 땅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