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9강(마17:14-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4. 09:14

마태복음 강해 제109(17:14-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20()

 

자신의 고난과 처형,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알고 계시며 그것의 일부를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예수님은(16:21) 그 후의 준비에 나서시다; 그 첫 번째 준비가 변화산상에서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17:1-8) 그 두 번째 준비로 볼 수 있는 본문의 뜻은 무엇인가?(17:14-21)

 

본문(17:14-21)의 사례는 특이합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리고 갔으나 능히 고치지를 못하자 그 아이를 다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경우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례를 기술함으로써 사도 마태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복음사역을 나누어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여러 고을로 열두 제자를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10:1-15). 그 동안 자신이 제자들과 더불어 갈릴리 여러 고을에 함께 다니면서 여러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했지만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9:35-38). 그래서 별도의 전도팀을 구성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제10장에 기록되어 있는 70명의 제자를 사마리아 여러 고을에 파견한 경우를 참조해보면, 갈릴리 지방에서도 12 제자를 2명씩 6개의 팀으로 조직하여 각 고을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2제자를 파견할 때에 그냥 보내지 아니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부여한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10:1). 그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할 때에 이미 축사’(逐邪, exorcism)병 고침’(healing)의 권능을 부여 받고 있었던 12제자들이 예수님을 도와서 함께 복음사역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본문에 의하여 분명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모세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장인 이드로의 헌책을 받아들여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의 재판을 나누어 맡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판단할 수 없는 큰 판결은 모세 앞으로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18:17-26).

일찍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능도 주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4:1-2). 그렇지만 세례 요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16:16, 1:14)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지만 단지 한 사람의 선지자에 불과한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그 대목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독불장군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큰 권세로 제자들에게 상당한 권능을 부여하여 복음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주님이시라고 하겠습니다(11:27-30).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 승천하고 나면 자신의 제자들이 복음사역을 독자적으로 계속해나가야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특별히 요청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주실 계획입니다(14:16-17). 하지만 자신이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고 있는 기간 동안에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도 더 많이 가르치고 복음사역의 모범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어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처형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예언을 하고 난 직후입니다(16:21). 마지막 유월절까지 채 일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빨리 제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의 간질병을 일으키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므로 그 부모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서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14-16).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꾸중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17:17). 물론 예수님은 당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해주시고 있습니다(17:18).

셋째로, 일과가 끝난 다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하루 동안 발생한 복음사역 현장의 일을 가지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의 이슈는 특히 낮에 있었던 어린아이의 간질병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7:19). 예수님의 답변이 의미심장합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풀이를 해보자면, 예수님의 믿음은 크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작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믿음이 크십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함께 지니고 계시기에 그 신성에 따른 믿음이 크실 것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인성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직 수습과정에 있는 학생들이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적어서 그 믿음이 작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 큰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산이라도 옮길 수가 있다고 부연설명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지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먼저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며 그 사용처가 정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사용처는 아버지가 보내어준 사람들을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5:24, 30, 6:38-39).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바라보기 이전에 메시아가 장차 세상에 가지고 올 하늘의 권세와 왕권(crown)을 바라보고 있습니다(16:28). 한 마디로, 논공행상에 관심이 큽니다(20:21, 10:35-37). 그것은 마치 염불이 아니라 잿밥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기도에 힘쓰시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14:23).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항상 서서 그 말씀 듣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그 결과 세상의 권세나 통치권에 관심을 두기 이전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고난, passion)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십자가 처형, death on the cross)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믿음의 크기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요인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3)  결론적으로, 고난이 없이 영광이 없으며 십자가의 희생이 없이 큰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스승이신 예수님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제자로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십자가라도 착실하게 질 수만 있다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믿음으로 산을 옮기지는 아니할지라도 내 마음의 무거운 짐과 형제들 마음의 어두운 짐을 옮겨놓을 수만 있다면 복음의 대로는 다시 활짝 열릴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