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고냐1(작성자; 손진길)
1. 여고냐의 고조부인 폭군 므낫세의 시대와 성군인 조부 요시야의 시대
주전 612년에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오래 괴롭히던 앗수르제국이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하여 수도 니느웨를 잃어버리고 하란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러한 변화가 발생하자 유다왕국의 마지막 성군으로 불리게 되는 요시야왕은 예루살렘의 신민들과 함께 크게 기뻐한다.
당시 요시야왕의 장손자인 여고냐가 3세가 되어 젖을 떼고 있다. 그래서 조부인 요시야왕이 맏손자인 여고냐를 품에 안고서 다음과 같이 신하들에게 말한다; “짐의 손자 여고냐가 복이 많아요. 그가 젖을 떼는 나이가 되자 우리를 오래 괴롭히던 앗수르제국의 수도가 외침으로 무너지고 말았군요… “.
그 말을 듣자 예루살렘의 궁궐에서 신하들이 요시야왕에게 축하의 말씀을 올린다; “경하를 드리옵니다. 모두가 국왕 전하의 홍복입니다. 일찍 장남 엘리아김 왕자를 얻으시더니 이제는 맏손자 여고냐가 젖을 떼고 있습니다. 우리 유다왕국의 복입니다”.
여고냐가 훗날 유다의 왕이 되어 겪게 되는 어려움을 미리 짐작하기 위하여 그의 조상들인 다윗왕조의 왕들이 앗수르의 치하에서 어떻게 고생하였는지를 먼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여고냐의 고조부인 므낫세의 부친 히스기야가 유다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주전 701년에 앗수르제국의 황제인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다. 처음에는 전쟁배상금을 받고 철수했으나 곧 말머리를 돌려서 유다왕국을 재침하고 있다.
20만명에 가까운 앗수르의 대군이 3년간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공격한다. 동시에 산헤립왕이 직접 이끌고 있는 30만명의 앗수르군이 라기스 요새와 미스바 요새를 제외한 유다의 지방 성읍과 촌락을 모조리 짓밟는다.
예루살렘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히스기야왕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다.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전 699년에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몰살시킴으로써 산헤립왕이 니느웨로 도망하고 만다(왕하19:35-36).
50만명의 대군을 3년간 동원하여 유다왕국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고 만 황제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두사람이 산헤립 황제를 얕잡아보고서 반란을 일으킨다. 주전 681년에 왕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공모하여 니스록 신전에서 부왕을 살해하고 수도인 니느웨를 장악한다.
그러나 일찍이 산헤립왕이 세자감으로 점 찍고 있는 에살핫돈 왕자가 바벨론에서 니느웨로 진격하여 반란의 무리를 쳐부순다. 대항하던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어서 그만 외가인 아라랏 왕국으로 도망하고 만다.
에살핫돈이 아라랏왕국까지 반란의 무리를 추격하여 그들을 전부 쳐부수고 만다. 그리고 수도인 니느웨에서 주전 681년에 앗수르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그때가 유다왕국에서는 므낫세왕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지 5년이 지난 시점이다.
둘째로, 에살핫돈 황제는 앗수르제국의 영토를 더욱 크게 넓힌 영웅왕이다. 그는 재위 12년 동안에 애굽제국을 치고 나일강 유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하를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에살핫돈 황제는 애굽에 총독을 두고서 직접통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외세의 직접통치가 애굽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욕보이고 있다.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큰 반란이 발생하고 만다. 애굽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하여 에살핫돈 황제가 원정에 나선다. 그러나 주전 669년 원정 도중에 에살핫돈 황제가 그만 하란 땅에서 죽고 만다.
그 뒤를 황자 아슈르바니팔이 잇게 되는데 그가 부황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룩한다. 왜냐하면, 아슈르바니팔왕이 주전 664년에 애굽의 바로를 멀리 구스 땅으로 쫓아내고 애굽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슈르바니팔왕은 영리하게도 직접통치가 아니라 간접통치의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는 애굽의 왕족인 느고1세를 새로운 바로로 세운다. 그렇게 애굽에 친(親) 앗수르 바로를 세움으로써 애굽의 영향권 안에 있는 주변국들이 반(反) 앗수르 정책을 버리고 자연히 신하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다왕 므낫세가 혼자서 반(反) 앗수르 정책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센 므낫세왕이 상당기간 앗수르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자 아슈르바니팔이 군대를 보내어 그를 잡아오게 한다.
일이 그렇게 되자 니느웨에서 므낫세왕이 아슈르바니팔 황제에게 백배사죄를 한다. 그리고 신하의 예를 갖추고 충성을 맹세하자 아슈르바니팔이 너그럽게 므낫세를 용서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다(대하33:11, 13). 그후 므낫세왕은 죽을 때까지 앗수르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친다.
그리고 므낫세왕은 한가지 사실을 노년에 깨닫게 된다; “우리 유다왕국의 힘으로는 패권국 앗수르제국을 대항할 수가 없다. 오로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앗수르를 물리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상을 섬기던 정책을 버리고 이제는 여호와를 섬김으로 앗수르를 물리쳐야만 하겠다”(대하33:12-13 의역).
그렇게 평생의 잘못을 뉘우치고 노년에 여호와신앙으로 돌아선 므낫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왕국을 당장 없애 버리는 것처럼 말씀하시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의 생존기간을 연장하여 주신다(왕하21:12-15 참조).
구체적으로, 마지막 성군 요시야왕이 다윗왕조에 나타나고 요시야의 3아들과 1명의 손자가 다윗왕조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55년간 오래 유다왕국을 통치한 므낫세왕이 주전 63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된다(대하33:15-20).
셋째로,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왕이 되자 다시 우상숭배정책을 선택한다. 그 결과 즉위한 이듬해인 주전 631년에 반역사건으로 죽고 만다. 그 궁중의 반란을 진압한 백성들이 업어 들인 왕이 바로 그의 아들인 8세의 요시야이다.
요시야는 장로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백성을 사랑하는 국왕으로 성장한다. 그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종주국인 앗수르제국에서 정복왕 아슈르바니팔이 주전 631년에 죽고 제국이 쇠퇴하기를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서 요시야왕이 조공을 끊고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자주성을 되살리게 된다.
넷째로, 요시야왕이 성군으로 칭송을 받는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즉위한지 18년이 되자 예루살렘성전에서 발견한 두루마리 신명기를 접하고 그 내용을 살펴본 후 크게 회개한 것이다.
요시야왕은 그동안 다윗왕조 유다왕국이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오래 지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우상과 산당을 제거한다. 그리고 유월절 행사를 전국적으로 재개한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왕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심령속에 여호와신앙을 깊숙이 심는 일에 있어서는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히브리경전을 복원하고 백성들에게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일인데 그것까지 시행하기에는 그의 남은 세월이 13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요시야왕의 죽음이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주전 609년에 애굽의 제26왕조의 제2대 바로인 느고2세(재위 주전 609-579)가 대군을 이끌고 해변길로 북상하는 것을 므깃도에서 저지하다가 그만 저격병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고 후송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기 때문이다.
당시 하란에 주둔하고 있는 앗수르의 군대가 신바벨론의 군대와 전투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것을 보고서 애굽의 바로인 느고2세가 앗수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북진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차제에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요새지인 갈그미스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굽의 대군이 해변길을 따라 북상하고 있으므로 유다왕 요시야가 그것을 좌시할 수가 없다. 언제 마음이 변하여 말머리를 돌려서 유다왕국으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시야왕이 신중하게 대응한다. 그가 일반병사의 복색을 하고서 므깃도 요새에서 애굽군을 저지하고 있다.
바로인 느고2세가 판단하기로는 유다왕국의 군사들의 행동이 적극적이다. 아무래도 요시야왕이 숨어서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탐조를 내보내어 누가 요시야왕인지를 먼저 살핀다. 그 다음에 명궁으로 구성이 된 저격병들을 전방에 배치하고 므깃도 요새를 공격한다.
애굽의 저격병들이 대어를 낚는데 성공한다. 변복을 하고 있는 요시야왕의 가슴에 화살을 적중시킨 것이다. 신하들이 급하여 요시야왕을 일단 지압하고서 예루살렘으로 후송에 나선다. 하지만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도중에 절명하고 만다.
국왕이 중상을 입게 되자 므깃도에서 유다병사들이 애굽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한다. 그것을 보고서 바로 느고2세가 말머리를 동북쪽으로 돌려서 시리아로 들어간다. 그는 단 3개월만에 갈그미스 요새와 주변 시리아 땅을 정벌하고서 회군한다.
여고냐의 조부인 성군 요시야왕이 죽고 난 후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주전 609년 조부가 별세하는 그때 장손인 여고냐가 6세의 꼬마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인 엘리아김이 25세이고 큰 숙부인 여호야하스가 23세이며 막내 숙부인 맛다니야가 9세의 어린 나이이다(왕하23:31, 36, 24:17-18).
성군 요시야의 불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모두 다윗왕조의 왕좌에 앉아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다툼과 외세의 개입이 유다왕국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그들의 여호와신앙은 하나같이 여호와의 눈 밖에 나고 있다. 이제는 그 점에 대하여 여고냐의 시선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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