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93강(마14:25-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6. 03:34

마태복음 강해 제93(14:25-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9()

 

실족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25-33)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14:25). 주후 29년경 갈릴리 호수 위에서 아직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아니한 이른 새벽녘에 발생하고 있는 전대미문(前代未聞, never heard)의 사건입니다(14:25a, 26a). 그래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유령’(幽靈, ghost)인 줄로만 알았습니다(14:26b). 사람은 몸무게 때문에 물 위를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령이 아니고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지난 3년간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공생애를 지내고 있는 스승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14:27).

그 다음에 발생하고 있는 일이 더 기가 막힙니다. 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갑자기 천방지축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14:28). 일개 사람에 불과한 베드로가 자신도 한번 스승 예수의 능력에 힘입어서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하는 야심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라!”(14:29a). 그 예수님의 한 마디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배 위에서 물 위로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물 위에 혼자 서 계시는 예수님 앞으로 전진을 하고 있습니다(14:29b). ‘기네스 북에 세계 두 번째로 물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은 시몬 베드로가 되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갑자기 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걷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엄습하고 있는 무서운 바람의 기세를 보고서 그만 두려움에 휩싸인 결과입니다(14:30a).

그 대목에서 두 가지 이상한 대화와 두 가지의 기이한 현상이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1)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14:30b)라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2) “믿음이 작은 자여, 의심하였느냐?”(14:31b)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실족하고 있는 베드로를 붙잡아서 다시 물 위에 세워주고 있습니다(14:31a). (3)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르시자 기이하게도 미친 바람이 그치고 있습니다(14:32). (4)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스승 예수님께 을 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

이상과 같은 두 가지 대화와 기이한 일들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사실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물 속에 빠져들어갈 때에 예수님께 구원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즉시 그를 붙잡아서 바로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사람이 실족하고 있을 때에 누구에게 구원을 호소해야만 하는지 그 대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실족을 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빠져들고 있을 때에 확실하게 예수님에게 구원을 호소해야만 합니다. 유일한 구원주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알고서 힘있게 부르짖게 되면 그 효과가 즉시 발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해주시듯이 성도를 주님께서 즉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엉뚱한 영적인 세력에게 구원을 호소한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정하지 아니한 구원자를 사람들이 임의로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3:16-17, 4:12). 그것이 소위 우상입니다(32:1).

둘째로,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뜻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처럼 물 위를 계속 걷지를 못하고 그만 두려움에 휩싸여서 실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보다도 더 믿음이 작아서 아예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어가볼 용기조차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라!고 하는 예수님의 한 마디를 신뢰하고서 물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과단성이 있는 행위입니다. 구약에서 비근한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요단 강에 발을 담그자 불어난 강물이 놀랍게도 갈라지고 있는 것입니다”(3:7-17).

셋째로,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물 위에서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눈만을 바라보면서 물 위에서 전진을 하다가 그만 그 눈을 돌려서 자신을 엄습하고 있는 무서운 바람의 기세를 바라본 것입니다. 두렵습니다. 그 바람에 휩싸여서 순식간에 물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느낀 순간 죽음의 공포가 베드로를 지배하면서 순식간에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즉시 물 위로 올려져서 바로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믿음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먼저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눈을 응시하면서 똑바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셋째, 만약 그 눈을 돌려서 세상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실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구약의 역사서 여호수아 제3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3:7-8).

넷째로, 구원은 사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서 그 말씀을 의지하여 한 평생을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시어 그 사실이 진리라는 점을 오늘 날에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주고 계십니다; “(구원의 결과인)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7:13-15).

제자들은 배위에서 분명히 목격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호수 위에 있는 자신들의 배로 접근을 해오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겁을 먹고서 그만 물에 빠져들고 있는 베드로를 다시 물 위로 끌어올려주셨습니다. 넷째, 배에 올라 오시자 당장 바람이 잔잔해지고 있습니다(14:32). 비슷한 경험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시자 광풍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8:24). 그 모든 사실을 경험하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새 포도주를 자신의 몸에 담기 위하여 예수님은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상의 시험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14:23). 믿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그릇을 깨끗이 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새 포도주와 같이 믿음의 그릇인 예수님의 몸과 마음에 담기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2)  믿음이 충만해지자 예수님이 드디어 아버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물 위를 걷고 있습니다. 믿음충만이 능력충만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3)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항상 의식하면서 공생애를 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던져져 있는 자신의 인생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26:3-5). 그들의 핍박을 무릅쓰고서 복음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생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4)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연약하고 약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26:41). 특히 십자가의 고난이 가까워질수록 그것을 면하고자 하는 육체적인 발버둥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26:38-39). 그래서 매일 새벽에 동산에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5)  이상을 종합해보면,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부모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없어도 부모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한 평생 도무지 부모님과 떨어지려고 하지를 아니합니다. 그와 같은 자녀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총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