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91강(마14:13-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5. 03:28

마태복음 강해 제91(14:13-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7()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52어의 기적의 특징 몇 가지(14:13-21)

 

첫째로, 이웃을 돕는 방법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4:16). 기본적으로 남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12:30-31).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만드신 이웃과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웃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이 어떻게 하고 있으므로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4:16).

둘째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없을 때에는 희사’(喜捨, donation)를 받아서 이웃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뿐입니다”(14:17). 공관복음에서는 공통적으로 제자들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먹을 거리를 점검해본 결과 그것밖에 없다고 보고를 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14:17, 6:38, 9:13).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달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지니고 있는 그것도 사실은 한 어린아이가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희사한 것으로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6:9).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서 이웃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14:19-20).

참고로,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남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1) 제자 빌립의 생각처럼 돈으로 해결을 할 수가 있습니다(6:5-7). 그렇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해결을 당장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설혹 200데나리온이라고 하는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빈들이므로(14:15) 먹을 것을 쉽게 구입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당장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점검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 이웃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14:16). (3)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군중들에게 도움(donation)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제자 안드레가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6:8-9). 한 마디로, ‘fund raising’이나 ‘donation’이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4) 마지막 방법을 예수님이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똑똑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14:19-20).

넷째로, 아무것도 바치지 아니한 채 하나님의 도움만을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빈약한 것입니다. 남자 어른만 계산하더라도 5천명이나 되고 있는 군중입니다(14:21, 9:14). 그들에게 모두 먹을 것을 나누어주자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먹거리가 필요할까요? 그 모자라는 부분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빈손으로 간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만 합니다(14:19).

비록 보잘 것이 없는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이지만 그것을 손에 들고서 축사하시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간곡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리를 부디 불쌍하게 여겨주십시오. 먹을 것을 하늘곳간에서 내려주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굶고 기진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될 불쌍한 무리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하는 예수님의 가슴 아픈 부르짖음이 지금도 이 땅에 들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지만 믿는 자가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23:15). 비록 초라하지만 그래도 뜻과 정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나아가야만 합니다. 특히 이웃을 살리기 위하여 부르짖고자 하는 그 간절한 심정만은 믿음으로 꼭 지니고 나아오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4:14, 19, 6:34).

다섯째로, 사람들의 극도의 이기심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군중 가운데 유일하게 어린아이 한 사람만이 자신이 먹을 도시락을 모두를 위하여 내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6:9). 오병이어의 기적의 내용은 두 마리의 생선반찬과 다섯 덩어리의 작은 떡을 가지고서 예수님이 남자 어른만 오천 명(14:21, 9:14) 전체적으로 이만 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것입니다(14:20).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9:11) 자신들의 질병을 고치겠다고(14:14) 좋은 뜻으로 모여든 무리들입니다. 모인 장소는 갈릴리 호수 동편의 넓은 잔디밭입니다(14:13, 19, 9:10-11, 6:1).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이기적입니다. 자신의 배가 고픈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먼저 먹어 치운 사람들입니다. 남과 함께 나누어먹을 여유와 아량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순진한 아이 하나가 자신의 도시락을 함께 나누고자 내어 놓았을 뿐입니다(6:9).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이기적인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여섯째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의 영향은 유대교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그 동안 예루살렘 방문을 주저하고 있었던 예수님이 이제는 더 지체하지 아니하고서 과감하게 일행을 이끌고 그 해 겨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7:2-10, 14). 그 결과 다음해 봄 유월절 직전에(12:1) 체포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의 영향은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14:13-21).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의 떡과 보혈에 대한 강한 설교를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6:24-59). 그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곳간에서 양식을 내려서라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양식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 육체적인 양식입니다. 둘째, 영적인 양식입니다”. 전자에 대한 예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얻어 먹은 만나와 같은 것입니다(6:31). 후자에 대한 예는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찢어서 주신 생명의 떡입니다(6:35, 48, 53).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만나와 같은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얻어 먹으라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6:57-59).

다시 묵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이 필요했을까요? 그 이유는 출애굽의 역사와 광야생활의 교훈만 가지고서는 백성들이 구원과 영생의 도를 완전히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출애굽을 위한 열 번의 재앙과 홍해사건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 사람들과 그 군대를 심판하는 내용입니다(12:29-30, 14:28). 그리고 광야생활 가운데 만나와 메추라기를 준 것도 현실적인 목숨유지와 생계를 위하여 준 식량에 불과합니다(16:13). 그런데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에 국한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장수함과 형통함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원한 구원과 천국에서의 삶을 일부 맛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일곱째로, 사도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세상에 먼저 나온 마가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세례 요한의 죽음을 적은 다음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4:10-21, 6:27-44). 그 두 사건 사이에 도대체 어떠한 연관성이 있기에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도 열두 제자의 파송 사건을 적은 다음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지만(9:1-6, 10-17) 묘하게도 그 두 사건 사이에 분봉 왕 헤롯이 혹시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로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는 장면을 삽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7-9). 게다가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도 백성들이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진리의 내용과 모세의 글조차 믿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33, 46, 6:1-15).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그 상관관계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1년 전이라고 합니다. 1년 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갈릴리에 온전히 머물고 계시던 그 해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1) 예수님은 공생애 첫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 청결사건을 일으켰습니다(2:13-22). 유대교지도자들의 곱지 아니한 시선 때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고향이 있는 소위 홈 그라운드’(home ground) 갈릴리 지역에 들어오셨습니다(4:3-4). (2) 두 번째 유월절기간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십니다(5:1). 그리고 성전 입구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5:2-9). 그렇지만 역시 바리새인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갈릴리로 되돌아왔습니다(5:18, 6:1). (3) 그리고 나서 세 번째 유월절에는 아예 예루살렘으로 가지를 아니했습니다(7:1). 그 해에 갈릴리 가버나움 왕궁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있자 갈릴리 호수 동편의 넓은 들판에 수 많은 백성을 모아놓고서 그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엄청난 기적을 연출하십니다(14:13-21). 그것이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기적을 바라본 백성들은 당장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중론을 모으고 있습니다(6:15a). 외세 헤롯 왕가를 쫓아내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6:15b).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헤롯 왕가를 예수님의 왕가로 교체를 해보아야 세상에 만민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는 자주독립과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고 구원과 영생을 얻는 방법론은 아닌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적인 권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그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