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92강(마14:22-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5. 03:30

마태복음 강해 제92(14:22-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8(주일)

 

배를 타고 먼저 떠나간 제자들이 겪고 있는 고난, 반면에 예수님은 산에 올라 먼저 기도를 하고서 고난의 현장을 직시하시다(14:22-27)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무리를 떠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4:22). 둘째, 홀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14:23). 셋째, 광풍과 큰 물결에 휩싸여 조난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작은 배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캄캄한 밤 사경에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위를 달려가시고 있습니다(14:24-27).

참고로, 여기서 밤 사경(四更,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NIV)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밤 시간대를 로마의 영향으로 3대별 또는 4대별하여 표기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4시간씩 또는 3시간씩 쪼개어서 계산한 것입니다. 후자의 방식에 따라서 나누어보면, 밤 사경은 4대별한 마지막 밤 시간대이므로 새벽 3시에서 6시까지를 말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어권 평신도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영어권 신학교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는 ‘in the early morning’으로 표기가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세 가지 행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남아 있는 무리들과(14:21) 분리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배를 태워서 재빨리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14:22). 왜 제자들이 기적의 현장에 계속 남아서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아니 되는 것일까요? 그 속사정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메시아)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4-15).

풀이를 해보자면,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반찬 2개로(6:9) 2만명이나 되는 군중을(14:21, 6:44, 9:14) 먹이시는 기적을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떡과 물고기를 얻어 먹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계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라고 확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6: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리 곧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6:15a).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14:19-21). 물론 각종 질병과 장애도 고쳐주실 것입니다(14:14). 한 마디로, 영광된 복지국가 힘있는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제국이 이 땅에 다시 건설이 되는데 그것을 마다할 유대인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이 은밀하게 산으로 피신을 하고 있습니다(6:15b).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선민의 영광을 위하여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거나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6:38). 그 뜻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내어주는 사람이라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하지 아니하고 복음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얻도록 만드는 것입니다(6:39-40).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 혼자서 산으로 급히 피신을 해버리게 되면 백성들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붙들고 통사정을 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제자들도 백성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메시아인줄 알고서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1:41, 45, 49). 스승이 다윗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게 되면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쫓아다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20:21, 24-27). 그러므로 제자들이 백성들과 뜻을 같이하여 스승을 설득하고자 찾아 나설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 점을 예견하시고서 예수님이 캄캄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급히 보내버리시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저녁 6시 해가 저물면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합니다. 농사일과 목축업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도 들판에서는 분명히 그러합니다(14:15). 하지만 갈릴리 호수에서의 어로작업은 다릅니다. 주로 조용한 밤 시간대에 고기잡이를 합니다(6:5, 21:3-4). 그때 물고기떼가 수면 가까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낮 시간 그리고 배가 많이 지나다니고 있는 낮 동안에는 물고기들이 수면 아래로 깊이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3분의 2가 갈릴리 출신입니다(9:9, 1:43-45, 21:2). 그들은 어로작업에 종사했거나 호수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밤에 노를 저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일은 그들에게 별로 문젯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14:24).

둘째로, 제자들을 급히 그 밤중에 가버나움으로 보내고 나서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14:23). 어두운 밤에 홀로 산에서 기도를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3:16-17).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1:32-34). 사도 요한의 표현 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1:14). 그러므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백성들의 각종 질병과 장애를 모두 고쳐주시고 있습니다(4:23-24, 9:33, 35).  더구나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을 먹이고 계십니다(14:13-21). 그것이 이른 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백성들에게 선을 보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 비밀의 열쇠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로 알려지고 있는 네 가지 마음 밭의 비유’(13:3-24) 그리고 가라지의 비유’(13:25-30, 36-43)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육신으로 그것을 실천해나갈 때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어려움에 대한 설명이 소위 네 가지 마음 밭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보통사람과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일한 인생이므로 세상의 시험과 사탄의 유혹에서 결코 자유스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함으로 말미암아 환난과 박해가 밀어닥치고 있습니다(13:21). 또한 세상적인 외로움과 공생애의 궁핍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13:22).

특히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한 세력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세상적인 임금으로 만들고자 합니다(4:8-10, 6:15). 보통 기도와 간구로써는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에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는 어려움이며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자신의 제자와 성도라는 새 부대에 담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9:17). 그 말씀 그대로 복음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예수님도 스스로 새 부대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을 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이 그날 밤 갈릴리 동편 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난파의 위험에 처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떠난 배가 새벽녘이 될 때까지 광풍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14:24). 여러 시간 동안 제자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멀리 갈릴리 호수 동편 높은 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진작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알아차리셨을 텐데 어째서 즉시 도움을 주지 아니하고 마냥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베다니의 나사로를 가족의 생각보다 늦게 살리시는 예수님의 영적 판단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다의 기별을 받고서 즉시 베다니를 방문했더라면 위독한 상태의 친구 나사로를 무난하게 살렸을 것입니다(11:3, 21). 그러나 요단 강 동편 마을에서 며칠 일부러 지체를 하고 있습니다(10:40-42, 11:6). 나중에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베다니를 방문했을 때에는 그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4일이나 된 때입니다(11:39). 그렇게 지체를 한 이유에 대하여 직접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더라”(11:4).

즉각 베다니를 방문하여 중병에서 나사로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서 썩고 있는 나사로를 죽음의 잠에서 깨워서 다시 되살려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받게 되는 일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며칠 지체하여 베다니를 방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생이란 삶을 통해서도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도 또 부활을 통해서도 전() 과정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예외가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갈릴리 호수의 광풍과 큰 물결 가운데 흔들리고 있는 배 위에서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몰고 오는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신위적인 구원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그 충만하신 새 포도주 곧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예수님이 단숨에 갈릴리 호수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그 배에 접근하고 있습니다(14:25). 마치 유령과도 같습니다. 오늘 날 수많은 술사들이 물위를 걷고자 하여도 모두 실패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14:26) 평안을 회복하라고 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14:27).

결론적으로, 죽음의 위기 속에서 들려오고 있는 예수님의 그 한 마디가 구원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훗날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들려올 것입니다. 확실하게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서 눈을 떼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환난과 핍박 가운데 그리고 고난과 고통 가운데 몸부림을 치고 있는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에 호수 위를 달려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시 두려운 환경이 사라지고 마음 속 평안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