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83강(마13:34-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1. 22:57

마태복음 강해 제83(13:34-3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29()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까닭(13:34-35)

 

예수님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3:34). 그 이유에 대하여 사도 마태는 시편 제7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3:35).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78:1-3). 이 시는 주전 10세기 다윗 왕 시절의 뛰어난 지혜자이며 선견자인 아삽의 시입니다(대상6:31, 39). 그는 놀랍게도 개인적으로 열두 편의 뛰어난 깨달음의 시를 지어서 시편에 남기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게 현명한 선지자 아삽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왜 비유로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답의 일부가 천 년의 세월이 지나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며 공회원인 니고데모를 만나서 말씀을 나누는 도중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3:11-15).

풀이를 해보자면, 지구라고 하는 작은 행성 그 땅에 갇혀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무한한 우주의 법칙과 그 창조의 이치를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거나 믿을 방도가 도무지 없습니다. 오직 가능한 설명이 비유입니다. 그것은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나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실에 비추어서 영적인 진리를 요령 있게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쳐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 뱀에게 물린 상처가 깨끗하게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21:8-9). 세상적인 치유방법에 비추어보게 되면 말도 되지 아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일단 믿고서 그대로 행한 자는 모두 낫게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장차 자신이 지게 되는 대속의 십자가를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탁월한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설명입니다(55:8-9). 둘째, 하나님의 창조는 항상 새로워서 사람들이 기존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48:6-7). 조금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어느 정도로 차이가 나고 있을까요? 이사야의 설명 그대로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9). 만약 인간의 생각에 따라서 우주와 천체를 운행했다고 한다면 벌써 균열이 생기고 깨어져버렸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자기위주로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전체를 움직이고자 하는 사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는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고작 나와 너와 우리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집단인 그들, 나아가서 다른 천체에 살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서는 애당초 인식이 부족하며 애정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한심한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연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비의 아주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비유로라도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대단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한번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는 매일같이 안식을 취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새로운 역사와 인생을 창조하고 계십니다(48:7). 예를 들면, 저희 교회 성도님 가운데 이민을 오셔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계시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 그 분들은 제법 오래 운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눈을 감고서라도 운전이 가능하지 않으실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답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위험하고 운전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관광도시이므로 새로 오는 여행객들이 운전을 하고 있어서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로의 사정이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한 경우가 한번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운행도 인생의 흐름도 그러합니다. 비슷한 역사가 반복이 되는 것 같지만 잘 들여다 보면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에 따라서 만물과 환경이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운 문제가 우주에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발생한 유사한 사례를 참조하여 새로운 창조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주더라도 영적인 사실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