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81강(마13:24-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0. 15:31

마태복음 강해 제81(13:24-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27()

 

천국 행을 방해하고 있는 원수와 가라지를 당장 뽑아서 처리하지 아니하고 추수 때에 가서야 처리를 하고 있는 이유(13:24-30)

 

예수님과 제자들이 천국복음이라는 좋은 씨앗을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리고 있습니다(9:35, 10:7). 그러자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복음이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며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13:24). 이제 성도들이 복음을 생활화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은 흔히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 마귀가 끼어든다)라고 하듯이 영적인 일도 그러합니다(6:12). 사람들이 복음을 생활화하고 신앙생활을 한번 잘 해보고자 하면 꼭 마귀가 먼저 알고서 이단사상을 가지고 거짓 선지자와 함께 성도들과 교회를 찾아 듭니다(13:25a). 그리고 복음의 진리와 비슷하지만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진리의 씨앗을 뿌립니다(13:25b). 그것이 바로 가라지입니다(13:26).

가라지는 본래 벼나 밀 그리고 보리농사를 지을 때 등장하고 있는 잡초입니다. 쌀농사의 경우 논에 모내기를 하고 나면 벼가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벼와 비슷하지만 잡초로 분류가 되고 있는 라고 하는 식물이 그 옆에서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리나 밀 농사의 경우에도 그러한 잡초가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라지또는 돌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리농사의 경우에는 그 피해가 더 크므로 아예 ()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라지의 특징은 옆에서 자라고 있는 농작물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일종의 균이나 곰팡이를 받아들여서 독성 알카로이드를 생성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농작물인줄 알고 잘못 먹게 되면 독성을 일으키게 됩니다. 독초와 같은 것이므로 추수 전에 제거를 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영 쉽지가 않습니다. 곁의 농작물과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 농부들이 논에서 피를 뽑으려다가 벼를 그만 뽑아버리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식별이 되는 시기인 추수 때까지 두었다가 한꺼번에 뽑고 제거를 하는 것이 쉬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땅의 영양분을 가라지가 빼앗아가고 있으므로 농작물의 생장(生長, 생육과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잡초제거와 관련하여 옛날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하나 생각이 납니다; “잡초가 함께 자라야 농작물이 튼튼하다. 서로 살기경쟁을 치열하게 하기 때문에 농작물이 튼튼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잡초를 주변에서 모조리 제거를 해버린다면 그 농작물은 연약해지기 마련이다. 비록 소출은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잡초와의 경쟁도 필요한 법이다”.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한 환경이라고 하더라도 고난을 이기고 강하게 자라나라는 말씀을 그렇게 가라지 비유를 가지고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측면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가 되면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13:29-30). 곡식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하여 가라지를 함부로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가라지 열 개를 뽑아서 제거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곡식을 잘못 뽑아버리게 되면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의 곡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는 주님이신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한 비유’(15:3-6)를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한 마리의 양을 끝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 영혼이라도 헛되이 버려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을 대상으로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들여다 보면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자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고 어떠한 자를 인도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마태복음 제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1-15).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백성과 그러하지 아니하는 백성 사이에는 분명히 그 대접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1-12). 영접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한 위격이시며(1:1-4)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지를 아니하고 제 고집과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한 자라는 불이익이 있게 됩니다. 크게 회개를 하고서 돌아오지 아니하는 이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하나인 탕자의 비유가 그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15:17-24). 아버지는 집을 나간 탕자가 회개를 하고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도시로 나간 아들을 찾아서 전국을 헤매며 가는 곳마다 전단지(傳單紙, 찌라시)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양은 실수로 무리를 떠나게 되면 집을 찾아오고자 울면서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염소는 제멋대로 뛰쳐나가고 영 집을 찾아오지를 아니합니다. 그러한 차이 때문인지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는 있지만 잃어버린 염소에 대한 비유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겠습니다(25:3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