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78강(마13: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8. 00:49

마태복음 강해 제78(13: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24()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백성들에게 소위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13:1-9)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유대인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5:40).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12:27-32) 귀신을 쫓아내고 백성들의 불치의 병과 장애를 온전히 고쳤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를 했습니다(5:30, 36-39). 특히 자신의 고향이 있는 홈 그라운드 갈릴리 지역에서는 2년 이상 집중적으로 복음사역을 실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미흡한 수준입니다(5:43-44).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일명 씨 뿌리는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3:1-9).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이 알기 쉽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뜻을 백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백성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생활화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른 사상과 교리 때문에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13:3-4, 19). 둘째, 복음을 일단 받아 들이지만 자신에게 그 때문에 불이익이 있게 되면 곧 버려버리는 경우입니다(13:5-6, 20-21). 셋째, 말씀대로 실천을 하는 것보다는 익숙한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13:7, 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백성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를 소위 마음 밭이 좋은 옥토와 같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100, 어떤 것은 60, 어떤 것은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13:8). 그와 같은 옥토는 참으로 귀합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네 가지 중의 하나인 25%에 불과합니다. 딱딱한 길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밭이라는 세 가지 경우를 벗어나서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갈릴리 지역에서 행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의 성과는 25%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가 열두 제자를 갈릴리 여러 고을에 복음사역의 주역인 사도로 파송한(10:1, 6-15) 이후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자들의 사역의 성과를 예수님이 자체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결과 그러한 자료를 얻었으며 그것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왕왕 전도와 선교의 결과가 대단하다고 자랑을 크게 하고 선전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당히 과장이 되고 포장이 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관여한 경우에도 25% 정도의 성과라고 한다면 오늘날 성도들의 성공사례와 지나친 자랑거리는 분명히 재고를 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25%의 성과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여덟 명의 제자의 고향이 있는 이른 바 홈 그라운드 갈릴리 지역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날 전도와 선교의 결과가 그 수치를 몇 배 상회하고 있다고 주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좀더 진지한 자가진단과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발적인 성령의 능력이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귀신이 쫓겨나고 불치의 병이 나으며 장애자가 일어서고 있습니다(4:23-24, 8:16, 9:33, 10:7-8).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의 가슴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4분의 1정도의 수확밖에 없는 것일까요? 역시 근본적으로 이적사역과 말씀사역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현장을 연출하는 것이 이적사역입니다. 평생 한번 경험하기 힘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감격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내면화되고 의식화가 되는 것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말씀사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의식화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영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져서 잘 자라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3, 8, 24, 고전3:6-7).

기적의 현장을 경험하고 본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러나 그 충격이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한번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을 완화시키고 이완시키는데 있어서 적응력이 아주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교훈과 학습의 효과가 결코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출산의 고통이 대단합니다. 다시는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몇 달 지나지 아니하여 잊혀지게 됩니다. 그 결과 둘째와 셋째를 연이어서 출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고통을 빨리 잊어버리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애초부터 그렇게 디자인이 되어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께서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떠한 처방을 마련하고 계실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마지막 충격 다음에 부활 승천이라는 역사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36개월 동안 공생애를 사신 후에 열두 명의 제자를 사도로 세울 수 있게 된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자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노하우는 육신이 죽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자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 육신 속에 내주하여 함께 인생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육신하여 행하신 복음사역을 영적으로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토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을 임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14:16).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믿는 성도의 속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있습니다(고전6:19-20). 그 성전에 영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임재하시게 됩니다(14:16-20). 그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 속에서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몸을 입게 되십니다(20:17). 부활의 몸은 성육신으로 입게 된 몸과 차원이 다른 몸입니다. 새로운 몸을 입게 됨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은 그때부터 시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20:19-22). 이제는 영적인 존재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체험하신 바가 있는 예수님이(2:18, 4:14-15) 이제 모든 믿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셨으니 그 역사가 실로 대단합니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하여 육체적인 공생애의 시대를 끝내고 영적인 공생애의 시대를 다시 열고 계십니다. 그 일을 담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자의 심령 속에, 의식 속에, 그리고 그 영혼 속에 내주하여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그 부활의 의미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구원의 의미를 영적으로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14:17, 26, 16:7-15).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도와 선교의 능력을 부어주고 있습니다(24:49, 20:22, 1:8). 그 방법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직접 내주하여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2:1-4). 요컨대 그것을 새 언약의 시대의 은혜이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