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76강(마12:38-4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7. 03:14

마태복음 강해 제76(12:38-4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메시아에게 구하고 있는 표적과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는 표적과의 차이(12:38-4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異蹟, miracle)사역에 대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있는 것이라고 흑색선전을 하고 있습니다(12:24). 그들은 백성들이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라고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하기 때문입니다(12:22-23). 따라서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의미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라 바알세불의 협조를 얻어서 그러한 표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악선전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내심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의 요구조건에 맞게 그 옛날 다윗 대왕처럼 구국의 대 영웅 메시아로서 활동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바램이 은연중에 반영되어 있는 질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12:38). 여기서의 표적은 다윗의 후계자로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헤롯 왕가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다시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여 온 중동 땅에 선민의 영광을 재현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깃발이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사이에서 다시 펄럭이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이방인들이 선민 이스라엘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우러러 경배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을 합니다. 요컨대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 그리고 랍비로서 산헤드린 공회에 참여하고 있는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희구하고 있는 그러한 메시아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예수님에게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대하여 거절의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표적이 하나 있다고 분명히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 선지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에게 동쪽 티크리스 강 상류에 있는 앗수르 인들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라고 했을 때 그는 정 반대쪽 서쪽으로 도망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방인의 땅에 가서 하나님의 명령 그것도 인기가 없는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민에게는 회개와 구원을 베풀고 있지만 멸망의 대상인 이방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인 자신을 이방 땅에 메신저로 보낸다고 하니 요엘 선지자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 일만에 살아나오면서 요나는 그 점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40일만에 온 도성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삼일 동안 온 도성을 다니면서 외치려고 계획을 했는데 하루 만에 그들이 모두 회개를 합니다. 그 결과 니느웨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1-3).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외치자 하루 만에 니느웨의 이방인들이 모두 철저하게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온 도성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민사상에 푹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려고 하는 선지자 요나의 생각을 돌이키게 만든 하나님의 이적은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요나를 큰 물고기의 뱃속에 넣고서 삼일 동안 지내게 한 후에 죽음의 바다 바깥으로 토해낸 것입니다(1:17).

그와 꼭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적을 예수님께서 장차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12:39-40). 고약한 선민사상에 젖어있는 그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칭 선민 유대인들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모두 요나 선지자의 경험을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강력한 표적이 아니면 도저히 유대인들의 집단이기적인 선민사상을 바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 사회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 (12:39a)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결코 동의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있는 선민들입니다(6:4-9).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 할례와 제사의식을 모두 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심전력으로 유대교의 전통을 파수하고 있으며 율법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면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기로 유명합니다(18:12). 그런데 왜 그들의 사회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중보의 기도를 드려줄 수 있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했더니(19:6) 전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을 하지를 아니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42:6-10). 그들의 진면목을 선지자 요나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1:1-3). 또한 음란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만민구원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만을 구원하고 세상나라에 대해서는 진노와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민족우월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푹 빠져 있는 그들입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만족시키는 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는 우상이며 도구주의적인 신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에 선민으로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회개를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선민사상을 청산하고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나서지 아니하는 이상 정치적인 메시아가 와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7:26-27). 오히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더욱 악하고 음란한 종교생활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예화를 들어가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설명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12:43-45).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경전에 밝은 율법선생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주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명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그 영적인 성취와 깨달음이 크겠습니까? 한 마디로, 랍비 사울이 이방인 사도 바울로 변화가 되는 역사가 다반사로 발생할 것입니다(9:1-22). 그 안타까운 심정이 예수님의 다음 말씀 가운데 한 가득 실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41-42).

결론적으로, 요나의 전도보다 더 큰 복음의 선포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보다 더 큰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르치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지 아니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안타까운 시선은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