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77강(마12:46-5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8. 00:48

마태복음 강해 제77(12:46-5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23()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우선순위(12:46-50), 그리고 하나님 사랑에서 무엇이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고 있는가?(12:30-31, 3:18)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을까요?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12:2) 성숙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와 같이 미묘하고도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을 때에 그 난관을 명쾌하게 벗어날 수 있는 절묘한 대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경우에 어떻게 처신을 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경우에 있어서 가장 미묘한 문제가 당장 눈에 보이는 모친과 동생들을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하고 대접을 했는가(12:46-47)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아버지보다 눈에 보이는 가족을 더 사랑했을까요?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뜻을 따라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후자입니다. 그 대목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48-50).

예수님의 정체성은 특이합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18). 그러므로 사춘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붓 아버지 목수 요셉이 자신을 장남으로 받아 들이고 동생과 일체 차별을 하지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친아버지가 아닌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자신은 무엇을 우선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열두 살짜리 예수님이 내린 결론이 누가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흘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즉 그(소년 예수)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2:46-49). 한 마디로, 모든 세상적인 인연보다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선하여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작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정체성보다 우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깨달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간세상과 자연계가 모두 운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11:36). 사람의 가족관계, 타인과의 관계, 국가간의 관계, 그리고 자연 만물과의 관계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과 자연계가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운영이 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어떻게 바로잡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체험적인 깨달음은 당연히 세상만물이 먼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인정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을 가져야만 합니다. 창조주 앞에 정직하게 바로 서서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시정해야 합니다. 그때 우주는 다시 창조주의 뜻에 따라 창조의 질서를 회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만물을 돌보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부터 그 능력이 전이되어 와야만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가지고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돌볼 수가 도저히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얻어야 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씀 속에서 영적인 깨달음으로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에(1:12-13) 비로서 이웃과 자연을 똑 같은 피조물로 대접하면서 그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에 힘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가득 차고서 위로 흘러) 넘치는(surpass, overflow, epi)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될 수가 있으며(12:46-50, 1:12-13)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꾼이 될 수가 있다(8:22, 6:39)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권세를 이 세상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을 해야만 합니다(1:12).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신 그 일이 바로 나 자신의 죄악을 청산하기 위한 것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나 같은 죄인이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인생은 예수님의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종으로서 살아가겠다고 하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세상의 혈통과 가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영적인 공동체와 가족관계가 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예수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다음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과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하여 몰려오고 있는 백성들을 모두 살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과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간 자를 구원하여 영생을 준다고 하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목숨과 같은 자들입니다(11:31-32, 7:4).

참고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고향방문을 하고자 휴가를 청하고 있는 제자에게 예수님이 주시고 있는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8:21-22). 형식적인 장례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는 자신부터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 천국의 복음을 충분히 듣고서 생명을 구하는 사도로 파송을 받아야만 합니다(10:1, 7, 21:15-19).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가 가능할 것입니다(9:37-38). 요컨대,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을 듣고 실천하는 일에 사력을 다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가르치심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