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84강(마13:36-4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1. 22:58

마태복음 강해 제84(13:36-4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3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가라지의 비유가운데 숨어 있는 성도들의 삶과 종말의 의미(13:36-43)

 

가라지의 비유가 제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아내지 아니하고 그냥 두었다가 추수 때에 가서야 한꺼번에 처리를 하시겠다고 예수님이 언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13:30). 그렇다면 곡식은 가라지와 함께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아내려다가 잘못하여 곡식을 다치게 될까 염려하여 심판을 지연한다는 설명입니다(13:29). 그러나 엄청 걱정이 됩니다. 곡식을 보호한다는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곡식의 입장에서는 심판 때까지 가라지와 끊임없이 살기다툼을 벌여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성도들의 세상살이가 힘들어질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0:16-23).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라지의 비유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시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13:36). 예수님은 종말심판과 관련하여 더 깊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人子, son of man)이신 예수님이시다(13:37).

(2) 밭은 세상인데 그 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씨앗이 뿌려져서 함께 자라고 있다; 좋은 종자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반면에 좋지 아니한 종자인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13:38).  

(3)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성육신하여 인자사람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좋은 종자를 뿌렸으며 반면에 원수 마귀는 악한 종자인 가라지를 뿌린 것이다(13:37, 39a).

(4) 추수 때는 세상의 끝을 말하며 추수꾼은 천사들이다(13:39bc).

(5)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과 같은 일이 세상의 끝에도 그대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13:40).

(6) 세상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들을 이 세상에 보낼 것이다(13:41a). 그들은 성도를 넘어지게 한 자, 불법을 행한 자를 색출하여(13:41b) 뜨거운 불 속에 던져버릴 것이다(13:42a).

(7) 악한 자들이 불 속에서 이를 갈아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13:42b). 반면에 환난과 고난을 이겨낸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13:43a).

(8) 끝으로, 이것이 무슨 의미의 비유인지 영적인 귀가 열려있는 제자들은 정확하게 듣고 믿음생활을 똑바로 하라는 설명인 것입니다(13:43b).

차제에 약간의 풀이를 더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기서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묵시록에서 종말에 관한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그 개념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 대목에서 다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마지막 때인 종말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사건이 발생할 것임을 선지서와 묵시록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1:15, 1:14, 3:3-16). (2)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며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다(65:17-25, 12:1). (3) 모든 죽은 자가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12:2).

둘째로, 구약 선지서와 묵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일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심판대에 서게 되는 일을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고 있습니다(5:25-29). 그렇지만, 베다니의 마르다가 신앙고백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부활에 대하여(11:24)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11:25). 예수님이 얻으시는 부활의 영광을 영적으로 이미 함께 누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5:24)”.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무덤 속 부활을 염두에 두시고 예언을 하고 계시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종말이란 세상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은혜를 믿게 되면 성도들에게 그 인생 가운데 거듭난 영적인 삶으로 개인적으로 찾아올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3:3-8). 어쨌든 선지서와 복음서의 종말적인 내용이 총정리가 되어서 요한계시록으로 집약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가라지의 비유는 구약적인 종말론과 복음적인 종말론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구약적인 종말론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홍수심판과 출애굽기에 나타나고 있는 애굽심판에 대한 내용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홍수심판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 노아의 집안만 제외하고 세상사람과 짐승들 모두가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6:6-8). 그리고 애굽심판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있는 민족 애굽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민족 이스라엘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심판과 구원이 주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12:12-14)”.

그런데 여기서 노아의 경우에는 구원의 폭이 너무 좁습니다. 적극적인 복음의 선포가 없이 바로 홍수심판이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심판의 경우에는 개인심판이 아니라 민족심판이라는 무리수가 따르고 있어 과연 정당한 심판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의 문제점을 모두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 소위 가라지 비유속에 숨어 있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심판의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설명하시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일꾼들에 의하여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가 되고 나서 비로서 그 추수에 해당하는 심판과 구원이 이 땅에 한꺼번에 임한다는 것입니다(24:14). 이에 따라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완주하고자 하는 결심을 새로이 해야만 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이 세상에서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한꺼번에 몽땅 제거를 해버리는 이적은 종말이 되기 전에는 임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주님의 설명을 명심하면서 성도들은 남은 인생 가운데 가라지의 환난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내성을 길러야만 할 것입니다(고후12:7-10). 그 방법은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말씀과 기도로 복음을 생활화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1:21-22,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