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9강(마10:16-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9. 22:00

마태복음 강해 제59(10:16-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5()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언, 복음사역자의 삶과 사역의 어려움(10:16-23)

 

흔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교회의 일도 모두 잘될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서 피상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면 세상은 화목해지고 이 땅에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동체나 사회가 형성이 되자면 절대적인 전제가 하나 필요합니다;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실천을 하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하고 그 결심이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에 비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100% 이상적인 삶을 추구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 안에서의 기도로 예수님처럼 하늘을 호흡하고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여전히 두 발로 땅을 딛고 있으며 그 몸을 땅 위에 눕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이상과 이념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아가서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하더라도 디디고 있는 땅과 몸을 눕히고 있는 가정을 도외시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현실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만 하고 또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성도의 갈등입니다.

그러한 본질적인 어려움과 갈등이 있기에 함부로 교회나 기독교사회가 거룩하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성도들이 거룩한 것으로 의제가 되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을 하셨기에 성도들에게도 그러한 은혜가 궁극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절대적인 진리로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사상에 대하여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한 유대교인들의 율법사회 속으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사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열두 사도가 파송을 받고 있습니다(10:1-11). 제자들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위와 같은 갈등과 어려움을 예수님께서 이미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적나라한 내용을 명심하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10:16-23).

예수님의 말씀은 당장은 열두 사도를 갈릴리 여러 고을로 보내시면서 주고 있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그 선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펼쳐지는 초대교회의 시대, 나아가서 오늘 날까지 예언적으로 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각 구절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직접 양육하신 제자들은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제자들에게 복음으로 가르쳐주었으며 예수님이 삶의 모범을 통하여 복음을 실천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익히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우두머리가 가는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좋은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 열두 명의 제자들은 끝까지 양과 같은 순종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6:66-71). 그런데 이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삼아 갈릴리의 여러 고을로 복음사역을 하라고 보내시면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구원을 위한 소위 선민사상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인들은 선민사상을 철폐하고 만민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상을 결코 영접하거나 수용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의 사상을 이단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복음사역자를 모두 잡아서 죽이는 것이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순한 유대 백성들이 이리와 같이 변모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자신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그 방책을 일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참담하기 그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0:16). 하나님의 아들이 제자들에게 사탄의 화신인 뱀(3:1)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마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책략을 무찌를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10:16a). 이리와 싸우자면 양이 늑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투에 흠뻑 빠져서 야성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참으로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말씀을 덧붙이고 계십니다; “결코 비둘기와 같은 온순함과 순전함을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라”(10:16b’에 대한 의미적 해석).

둘째로, 유대교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율법에 비추어서 교인들의 행동을 치리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며 중앙 예루살렘에는 산헤드린 대공회를 설치하고 지방 네 군데에는 그냥 산헤드린 공회를 두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는 성전과 대공회가 있습니다. 네 지방의 하나인 갈릴리에는 여러 회당과 하나의 공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 각 고을로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10:1, 6-8). 그들이 유대교인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으며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유대교인들이 사도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할 것입니다. 공회의 판결에 따라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단속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갈릴리 각 회당에 사도들을 끌고가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것입니다(10:17).

셋째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만 회부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목숨을 빼앗고자 획책할 것입니다. 당시 사형집행의 권한은 로마의 총독이나 헤롯 왕가가 쥐고 있습니다(14:7-12, 18:31). 따라서 사도들을 총독이나 임금 앞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10:18a). 예수님께서는 그 기회를 통하여 그들 로마의 총독과 헤롯 왕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0:18b). 참으로 복음은 때를 얻든지 못하든지 자꾸만 제자들에 의하여 증거가 되며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유대교 백성들과 이방인인 지배자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10:19-20). 그와 같은 사례를 집사 스데반의 경우에서 똑똑하게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7:1-56).

다섯째로, 복음의 전파를 사탄이 적극적으로 방해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밀착방어를 할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동원하여 훼방을 할 것입니다. 형제를 통하여, 아버지의 친권을 통하여, 또는 자식을 통하여 그렇게 천륜(天倫)을 어겨가면서까지 무자비하게 복음의 전파를 막고자 할 것입니다(10:21). 예수님의 경우에는 동복동생들이 자신을 반대했습니다(7:3-5). 고향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13:57). 마지막 체포의 과정과 처형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제자들도 뿔뿔이 제 살 길을 찾아서 흩어지고 맙니다(14:27).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그 심정을 토로하고 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복음을 붙들고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많은 영혼을 구하고자 노력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틀림없이 외로워지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격려하심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

끝으로, 그렇다면 박해가 있는 그곳에서 그냥 순교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의 인사이동이 복음사역자들에게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와 제자들은 육체를 입고 있기에 그 시야와 안목이 시공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성령님과 똑같이 시공간을 초월하여서 선교의 전략을 짜시고 제자들을 인사이동하고 계십니다(21:18-19, 22, 16:6-10).

그와 같은 입장에서 목자장이신 예수님이 사도와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10:23),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