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8강(마10:11-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9. 00:24

마태복음 강해 제58(10: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4(주일 밤)

 

사도가 머무는 집이 합당한 집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과 그 마을이 복음사역지로서 더 이상 합당한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10:11-15)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갈릴리 지방 여러 마을에 복음사역자로 파송을 하시면서 경비지원을 일체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현지에서 지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10:11). 현지에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계속 머물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합당한 자를 어떻게 찾아낼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전번 강해에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하여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응답을 받게 되는 경우에 나타나는 특징 한 가지를 친절하게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시하시고 있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0:12-13).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시고 있는 평안을 확인하는 방법이 복음사역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방법이 되는 동시에 언제 그 집이나 그 동네를 떠나야 되는지를 짐작하게 되는 기준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은 육체를 가지시고 인생을 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고 계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평안한지를 묻고 계십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 있는 장면이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 마음속 깊은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평안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만남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설 때에 이 방법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하기를 빌어줍니다(10:12). 그 평안을 받아들이는 집이 바로 그들이 머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집입니다(10:11).

둘째로, 사도 바울이 평안을 비는 방법을 그의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평안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에게 강림하여 임재하시게 되면 놀라운 일이 발생을 합니다; “성도의 속사람 속에 먼저 성령의 전이 형성이 됩니다. 그러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오셔서 그 성전 안에 함께 임재를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도 그 성전에 머물게 되십니다”(14:16-20, 8:9-17, 고전6:19-20). 소위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는 기쁨이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4:14, 8:6).

셋째로, 사도가 베풀고자 하는 평안의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말씀사역과 기도하는 일입니다(6:4). 사도가 전해주고 있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마음속에 평안이 회복이 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평안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16:33). 그리고 사도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권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0:1).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기도에 동참을 하게 되면 치유의 효과가 급속할 것입니다(8:13, 9:22).

넷째로, 상대방이 사도가 베풀고자 하는 평안의 복을 거절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을 합니다. 더 이상 사도의 말씀이 마음에 기쁘지 아니하며 사도의 기도가 별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도가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운 그대로 복음사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미련스럽게 지체를 하게 되면 그야말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는 것”(7:6)과 같은 형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나 사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련을 두지 말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라고 하십니다(10:14). 이제는 종이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직접 치리(治理)를 하시는 수순(手順)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경우를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복음사역을 배척하고 크게 방해를 한 경우입니다(8:34, 11:20-24, 13:57, 26:4). 그때에는 주님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치리를 하시도록 맡겨드리고 그 동네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용서하시면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배척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싶어하십니다(23:34).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예수님이 파송하고 있는 사도와 제자들의 복음사역까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전부 그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동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이미 용서의 기회가 모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5),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