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4강(마9:27-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7. 01:22

마태복음 강해 제54(9:27-3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31()

 

두 맹인(盲人,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을 고친 경우와 귀신이 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을 고친 경우의 차이(9:27-34)

 

첫째로, 두 맹인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9:27). 반면에 귀신들린 벙어리는 남에게 이끌리어 예수님께 나아온 자입니다(9:32). 이를테면 두 맹인은 스스로 신앙을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벙어리에게서는 그 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대표적인 간접신앙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나음을 얻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중요하지만 믿음을 가진 좋은 사람의 영향과 관심을 받고 있는 그 사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중보기도 또는 도고’(딤전2:1)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두 맹인은 눈은 보이지 아니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불치의 병자를 많이 치유하여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이 치유해주었다는 것은 100% 모든 병자나 장애자를 고쳐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기준이 있는지 몰라도 선택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낫게 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기만 한다면 그 능력은 발휘가 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마치 잘 알고나 있는 것처럼 두 맹인은 크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9:27).

셋째로,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의 반응이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9:28a).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맹인들이 기운차게 대답합니다; “주여 그리하오이다”(9:28b). 그 다음 순서는 거의 자동적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안수를 하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십니다(9:29). 그러자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은 그 믿음대로 나음을 얻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열매가 무성한 것이 스스로의 믿음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간접적인 믿음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마태도 그 치유의 과정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결과만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9:32-33).  

다섯째로, 두 맹인과 귀신들린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대부분의 백성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세상에 나타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9:33)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왜 그와 같은 치유의 사역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습니다(1:26-27). 그러므로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과 같이 그 앞에 서게 되는 인간도 온전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사람들도 온전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하나님 자녀의 모습으로서 올바로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회복의 역사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사역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6:39-40).

(2) 반면에 그와 같은 회복의 역사를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삐뚤어진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선민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정상적인 모습으로, 이방인은 불의한 사람이므로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심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와 같은 선민사상과 율법사회의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선민 이방인 구별할 필요가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의롭지가 못하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9:13, 18:14). 모두가 고침을 받아야만 하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많은 맹인들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귀신들인 벙어리를 보고서 귀신을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의존하여 그와 같은 이적을 베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이단적인 행위라고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9:34, 12:24).

여섯째로, 귀신들린 농아자를 고치신 경우에는 주위에 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혼자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9:32). 그러한 와중에 예수님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위적인 치료행위를 목격한 증인 모두에게 치유가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함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두 사람의 맹인인 경우에는 함구령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9:27)라고 소리를 치자 예수님 일행이 그들을 조용히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9:28).

끝으로, 아무리 함구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맹인의 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뜨게 해준 사실이 묻혀질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진리는 진실을 가리고 묻으려고 할수록 역설적으로 더욱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더 빠른 속도로 전파가 되어나갈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9:30-31).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5).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을 어두움 속에 감추지 아니하시고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널리 비쳐질 수 있도록 그렇게 역사를 섭리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입이 근질거려서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소문을 내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가리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결국 허사가 될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계속 보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