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3강(마9:18-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7. 01:20

마태복음 강해 제53(9:18-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30()

 

사도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야기와 열두 해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져서 나음을 입게 된 이야기를 그토록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가?(9:18-26, 5:21-43, 8:40-56)

 

사도 마태가 어느 정도로 간략하게 그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양적인 측면에서 따져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동일한 내용을 공관복음에서 모두 다루고 있는데 마가는 제5장에서 23절에 걸쳐서 굉장히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제8장에서 역시 17절에 걸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사도 마태는 그 두 사건의 소개에 제9장에서 달랑 9절만을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과 비교하면 절반의 분량이고, 마가복음과 비교하면 40% 정도의 분량에 불과합니다. 왜 사도 마태는 양적으로 그 정도로 그 비중을 줄이고 있으며 그 남는 지면으로 같은 장에서 무엇을 기록하고자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지면을 줄임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는 기록의 부족을 다른 공관복음을 참고하여 해석을 해본 다음에 사도 마태의 의도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그 두 사건의 스토리와 의미를 전체 공관복음의 테두리 내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 제9장 제18절에서 한 관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사실 갈릴리 호수 서편에서 회당을 운영하고 있는 회당장이며 그 이름이 야이로입니다(5:21-22, 8:40-41). 회당(synagogue)을 세우고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레위인이며 랍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이며 마을의 유지이고 종교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그렇게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율법생활을 잘 하고 있는 야이로에게 걱정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2)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고자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의 어린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5:23, 8:42). 그런데 사도 마태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 관리의 딸이 손쓸 틈이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9:18). 회당장 야이로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3)  야이로의 믿음의 뿌리를 사도 마태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엘리야나 엘리사에 비견할 수 있는 선지자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중병으로 숨이 끊어져 죽자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살려내게 됩니다. 그 아이의 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왕상17:17-24). 엘리사의 경우에도 죽은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역시 살려내게 됩니다(왕하4:25, 32-37).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므로 예수님이 그 집을 방문하여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켜서 가볍게 살려내고 있습니다(9:24-25).

(4)  마가는 예수님이 소녀를 살려내시면서 달리다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외쳤다고 말합니다(5:41). 그리고 의사 누가는 그 소녀의 영이 다시 그 몸에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8:55). 하지만 사도 마태는 그와 같은 표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간결하게 그 소녀의 손을 잡자 죽은 자가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9:25). 그 장면은 소녀의 믿음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이 상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5)  마가는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열두 해 혈루병 여인이 낫게 된 사건이 발생하여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5:34-35). 의사 누가도 동일한 줄거리를 적고 있습니다(8:49). 그런데 사도 마태만은 그와 같은 과정을 모두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이미 그의 딸이 금방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9:18a). 그리고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심방하시면 죽은 딸도 살려낼 수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9:18b). 그와 같은 야이로의 신앙은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는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의 경지보다 더욱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11:21, 24, 32). 물론 야이로의 딸은 금방 죽었고 베다니의 나사로는 죽은지 4일이나 되었다고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11:39). 그러나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야이로의 신앙이 돋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도록 마태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6)  열두 해 혈루병을 가진 여인이 낫게 된 이야기 역시 사도 마태는 간략하게 싣고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9:20-22). 당시의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며 불치의 병입니다(15:2). 부정한 것이므로 사람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목숨을 걸어놓고 가만히 예수님께 접근을 했습니다. 수 많은 병자들이 서로 밀치면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지만 아무도 나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그 여인만이 살며시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도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동적으로 치유의 능력이 그 여자에게로 빠져나간 것입니다(5:30).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7)  예수님이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5:34). 그렇다면 야이로의 딸이 되살아난 것도 그녀 아버지의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이 메시아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마태가 가장 간결하게 두 사건을 진술하면서도 정작 놓치지 아니하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간결한 문장일까요? 그것은 계량적으로 마가복음 제5장 제25절과 제34절 사이의 내용과 누가복음 제8장 제43절과 제48절 사이의 내용을 9:20-22’절 본문과 한번 비교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사도 마태가 어째서 제9장에서 되도록 간단하게 그 두 사건을 수록하고 넘어가고자 하고 있는지 그의 숨은 의도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의 의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복음서 제9장에 함께 수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는 제9장에서 그 두 사건에 대한 기사 외에도 여러 가지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9:6-7), 맹인(9:27-30), 귀신들린 농아자(9:32-33)는 물론이고 기타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9:35) 고치셨다고 한꺼번에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마가는 제5장에서 귀신들인 사람을 고치고 그 두 사건이 발생한 것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제8장에서 역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고 그 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가 훨씬 폭넓은 시야를 제공해주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왜 사도 마태의 시야가 더 넓은 것일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여러 사건을 공평하게 다루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태의 학문과 직업의 영향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는 세관원에서 일했습니다. 세리는 일종의 공무원입니다. 따라서 업무에 공정을 기하려고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공무원 출신 마태에게 있어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내는 이야기 그리고 열두 해 혈루병 여인이 낫게 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 맹인, 농아자, 기타 각종 병자와 장애자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모두 골고루 예수님께 나아와서 나음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 마태는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는 직업의식으로 비슷한 사건을 공정하게 골고루 취급하고자 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복음서 제9장에서 현저하게 눈에 뜨이고 있는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사도 마태도 교포출신인 마가나 의사 누가 못지 아니하게 상당히 폭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식견이 대단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세관에서 오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관원은 국제간의 교역에 따른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일을 취급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이웃의 시리아어 그리고 국제어로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나라의 상인을 많이 접하는 관계로 국제정세에도 꽤 밝습니다. 그러한 사도 마태이기에 그의 복음서는 본토 유대인의 좁은 식견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훗날 정경화 작업을 진행할 때에 복음서의 첫 자리에 마태복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도 마태의 복음서가 만민구원의 세계종교인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첫 번째의 정경으로서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마태복음은 공정하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복음서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