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2강(마9:14-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6. 01:38

마태복음 강해 제52(9:14-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29()

 

세례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 금식의 이유를 모르고서 금식을 하고 있다(9:14-15)

 

예수님이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레위를 제자로 삼고서 그의 집을 방문합니다(9:9-10). 레위는 예수님 일행을 위하여 잔치자리를 마련하며 자신의 이름을 이제부터 마태로 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2:14, 9:9). 그 의미는 더 이상 동족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세리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마태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레위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인 레위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불러주셨다는 그것이 참으로 기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련한 잔치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죄인인 세리의 집에서 환대를 받고 있는 예수님 일행의 정체가 아리송한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벌을 주고 의인인 선민에게는 상을 주셔야만 하는 자가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예수님은 전혀 그리스도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의를 제기했더니 예수님의 답변이 강경합니다(9:11-13).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고 있는 자칭 선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인줄 알고서 회개하며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은 놀랍게도 누구나 선지자라고 믿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9:14). 그들의 생각에는 금식이 의로운 행위이며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자랑거리입니다(18:12). 그러므로 금식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거룩한 의인의 삶이 아닙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들 앞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젯거리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역시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9:15). 예수님은 금식에 힘쓰고 있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시고 상을 베풀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에 회개하는 죄인들을 신부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3:29). 회개한 자들을 성도로 삼아 제자로 양성하고 그들과 함께 천국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66:20-21, 28:19-20, 14:25, 6:39).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리스도 사역의 목적을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해석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 또는 그들이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고 있는 율법의 말씀과 그 뜻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의 선지서 한 구절을 해석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58:6). 금식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는 자들은 금식이 의인의 징표이며 금식을 통하여 흉악의 결박이 풀려지며 멍에가 벗겨지고 압제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기뻐하시지만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은 일을 먼저 해결을 하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흉악하게 사람을 다루지 마십시오, 무거운 멍에를 지우지 마십시오, 핍박과 박해를 중단하십시오, 제도적인 멍에를 벗겨주는 법적 정치적 장치를 마련하십시오”(58:6절의 의미적 해석). 그와 같은 개인적 사회적인 변화가 없이 금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하나님 앞에 관철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참으로 응석받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초등학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4:3, 9, 2:8, 20).

 

예수님의 제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엄청난 기쁨과 슬픔 그리고 영원한 기쁨과 고난(9:15-17, 44:2, 14:17, 15:18-19, 17:14)

 

잔치자리는 흥겹습니다. 특히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성도들의 최상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면 가는 곳마다 귀신이 쫓겨나며 질병과 장애가 떠나가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 세상에 흘러 넘치고 있던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중지를 하게 됩니다. 더 이상 흉악과 멍에와 압제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금식하며 간절하게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9:15).

차제에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9:16-17). 예수님이 사용하고 있는 교육의 재료는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그리고 새 부대 등입니다.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재료들일까요?

한 마디로, 궁극적으로 생베 조각은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고 새 포도주는 성령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의 말씀을 그 마음 속에 받아 들이자면 낡은 유대교의 사상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사상 그리고 선민사상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선민사상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금욕주의 사상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10:14).

진리의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구약시대처럼 잠깐 오셨다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만 잠시 임재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지만 제사를 지내는 정식절차를 무시하고 백성들의 인기에 야합하여 정치를 했습니다(삼상13:8-15).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이 떠나시고 악령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삼상16:14). 그와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강림하신 성령님은 평생 떠나지를 아니하십니다(14:16, 2:1-4).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작심하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되면 누구에게나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2:28-32).

그런데 진리의 성령님은 반드시 주님을 모시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 제자들에게 임재하시고 역사를 하십니다. 새 부대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내주시키기 위해서는 소정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변화시키는 절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자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집니다(14:17). 공생애를 함께 하면서 수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능력의 메시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자 소망이 사라지고 한 없이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21:3).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크게 슬퍼하고 있습니다(19:25, 20:11). 그런데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덤 속 부활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28:6).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맛보고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자 결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마침내 오순절 날 진리의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임재를 하십니다(2:1-4). 새 부대가 마련되었으니 새 포도주가 담긴 것입니다. 그 결과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각자 120개의 다른 외국말로 하나님의 큰일 행하심을 증거하게 됩니다(2:1-4). 그것이 초대교회 최초의 방언의 역사입니다. 온 땅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알게 될 때까지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믿게 될 때까지 진리의 성령님은 제자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기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작품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시나리오가 은근히 모습을 비치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형 요셉이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구원하여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아직 5년간의 흉년이 더 남아있는 가나안 땅에 그냥 방치하게 되면 베냐민이 결국 기아로 죽고 말 것입니다(45:6-7). 그래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온 베냐민의 부대 속에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숨겨둡니다(44:2). 그 헌 부대 속에 들어 있는 은잔 때문에 베냐민은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44:13). 나중에는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아예 아버지 야곱의 식솔들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45:1-13). 모두들 굶주림과 흉년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스토리가 정확하게 예수님의 오심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3년 반 동안 공생애를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가르쳐주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마치 요셉의 은잔과 같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생애를 기억하고 있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20:19-23, 21:15-19). 그리고 구원과 영생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면서 남은 인생을 고난 가운데(15:18-19, 17:14)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28:18-2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