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0강(마9: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5. 02:53

마태복음 강해 제50(9: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27()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바라보는 서기관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과의 차이(9:1-8, 8:5-13, 4:7)

 

사도 마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실을 제8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풍병자의 상관인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지시하시더라도 그 병마가 떠나갈 것을 믿는다고 말하자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을 중풍병에서 낫게 한 것입니다(8:8-13). 그러므로 본문 제9장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이제 문젯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원거리에서 말씀 한 마디로 중풍병자를 고치셨는데 당장 눈 앞에 대령을 해놓은 침상의 중풍병자를 못 고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9:2) 사실 이미 소개했던 이야기보다 훨씬 강도가 약한 것 그것도 똑 같은 스토리를 다시 말하는 것은 신선도가 떨어지고 식상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마태가 또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제9장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8장과 비교하여 제9장은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중풍병이 낫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장 본문의 주제는 병 고침이라기보다는 죄 사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보시고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고 선언을 하시자 서기관들이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내심 그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는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9:3). 서기관들이 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고대사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철칙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를 얻는 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실패를 하고 병마에 허덕이는 자는 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선하고 의로운 자는 부귀를 얻고 형통함을 맛보고 있으며 악하고 불의한 자는 그 반대로 처참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특히 욥기가 그와 같은 고대사회의 관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한 마디로, 죄인이기 때문에 욥처럼 재앙을 만나고 몸에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그와 같은 생각에 전혀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서 의인인 자신이 왜 처참한 지경에 처해야만 하는지 죽기 전에 그 이유를 듣고 싶어합니다.

모세의 율법 역시 인과응보의 철칙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복법적인 사회를 운영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1:23-25). 그 사상이 유대교 율법사회를 이끌고 있는 서기관들에게 확고합니다. 그러므로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죄의 값을 당연히 중병으로 받고 있는 것이니 동정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기 하나님의 속뜻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의로운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의식과 관습은 430년간 살아온 애굽의 것이기 때문입니다(7:21-24). 예를 들면, 당장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간 후 무소식이 되자 그만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32:1-6). 시내 산 정상이 강림하셔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격노하십니다. 당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멸하시고 모세의 집안만으로 새로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내고자 하십니다(32:7-10). 그러나 모세가 중보자로 나서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출애굽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부디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32:11-14).

그 결과 하나님의 내심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생명의)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2:33-35). 일종의 조건부 용서함입니다. 장차 보응할 날이 있을 것이며 그때까지 처벌을 유보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 보응하는 날이 언제일까요? 모든 백성들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를 모두 대신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게 되는 때입니다(3:16). 더 정확하게는 십자가 대속의 제사가 있게 되는 날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중풍병자를 향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린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일시적인 효력만을 가질 뿐입니다. 태양력으로 1010일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한꺼번에 대제사장이 큰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에서 속죄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효력은 일년에 불과한 것입니다(16:29-34). 그런데 그와 같은 속죄의 제사의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 중풍병자에게 감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세한 제사법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행위이며 동시에 유일하게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율법의 규정을 과연 예수님께서 모르고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9:4-5).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9:6). 그리고 죄 사함을 받게 된 중풍병자는 현장에서 바로 병이 낫게 됩니다(9:7). 영적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즉석에서 몸이 낫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중풍병이 낫게 된 그 사람은 이제 행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의 위반이며 하나님의 신성한 주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고 있는 서기관들은 불만입니다. 그 둘 사이의 위화감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통일할 수가 있을까요?(4:6) 그 해결의 장이 바로 대속의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1:20). 백성의 참상을 긍휼히 여기고 죄 사함의 용서를 해준 예수님이 그 책임을 지고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놓은 현장이 골고다 언덕입니다. 그 은혜로 중병이 나으며 죄인이 의인으로 간주가 되는 새로운 역사가 이 땅에 전면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53:4-12, 8:1-6).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을 다시 한번 찬양합니다(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