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이유와 탕자의 비유(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5. 08:33

제목;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이유와 탕자의 비유”(3:21-24, 15:11-24)

설교일; 주후 202361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65일 월요일 King’s Birthday 작성)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Maori)는 크게 보아 두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특이한 인사의 방식입니다. 서로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에 코를 마주 대고서 키아 오라!’(Kia Or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생명의 기운을 함께 호흡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19세기에 영국사람들이 뉴질랜드 땅에 처음 들어와서 살게 되자 그들에게 평화적으로 함께 살자고 하는 큰 포용력을 보인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마오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 약탈자이며 침략자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만약 원주민 마오리의 인사법과 같이 함께 생명의 기운을 공유하는 삶의 방식을 유럽인들이 선택했다고 한다면 뉴질랜드는 전쟁을 통하지 아니하고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낙원(paradise)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아쉽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들은 자연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가피하게 먹거리를 구하기 위하여 동물을 사냥하거나 집을 짓기 위하여 나무를 베게 되었을 때에도 형제와 같은 그들의 목숨을 해치게 된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용서를 먼저 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자연보호법의 제정취지를 설명하면서 원주민 마오리의 자연보호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그 법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개발을 위하여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마오리들의 자연보호정신이 무엇인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개한 정령신앙의 일환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들의 특이한 점 두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있는 이유는 오늘 강해설교의 내용과 그것이 다음과 같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오경 가운데 첫번째가 창세기입니다. 그 가운데 제2장 제7절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KJV, “7.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창조주 여호와께서 생명의 기운을 흙으로 만든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주자 그가 살아 움직이기를 시작하면서 특히 혼적인 기능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창조주 여호와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로서 혼적인 기능을 보이고 있는 경우와 여호와 앞에서 살아 있지 못한 존재로서 역시 혼적인 기능을 보이고 있는 경우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자가 창세기 제2장과 제3장에 등장하고 있는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에서 여호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아담부부의 경우입니다. 후자는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제3장 말미에 등장하고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부부의 경우입니다(3:22-24).

(2)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락원(the lost Paradise)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담부부가 다시 창조주 여호와의 생명의 기운을 그 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 방법을 창세기 제4장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유한한 육신을 가진 자)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부디 창조주의 생기를 다시 호흡할 수 있도록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였더라)”(4:26).

(3)  실락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간구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마침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수가성의 여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진리(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 진리성을 깨닫고 그 뒤를 따르고자 결단하면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진리예배할지니라”(4:23-24). 요컨대,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창조주의 영생의 기운을 함께 호흡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4)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계명과 율법의 정수는 다음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8. 서기관 중 한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는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28-31). 잠시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5)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은 율법선생인 랍비 가운데 그 실력이 뛰어나서 산헤드린 대공회원의 자격을 얻고 있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 자가 예수님에게 하나님말씀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고서 창조주 여호와를 생명의 아버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만든 모든 피조물을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웃으로 알고서 제 몸처럼 아끼고 그 생명을 돌보라는 것입니다(3:4). 그와 같이 아가페 사랑과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가 창조주 여호와와 함께 생명의 기운을 호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친절하게 창조주 여호와께 돌아가서 영생의 기운을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이 회개를 하고서 영생이 살아 숨쉬고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요?

그 점을 알아보고자 오늘은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깊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그때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이기에 이제는 에덴동산에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바깥세상으로 쫓아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깥세상 실락원에 살게 된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얻어야만 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처럼 고생 끝에 발견한 아버지 집의 가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이 회복되며 창조주와 함께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15:11-32). 그 내용은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한 가운데 살았던 아들이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집을 떠나서 살다가 회개하고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 대신에 물질인 재산만 있으면 충분히 바깥세상에서 한평생 제멋대로 잘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받아낸 그 재물은 바깥세상에서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살기다툼의 현장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마침내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깨닫게 됩니다.

탕자는 그때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참회하면서 함께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 하나님이 따뜻하게 맞이하고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해 주십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을 탕자의 비유로 풀이하여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가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2-24);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품게 된 사람이 그 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죄 가운데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지옥 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처벌을 받게 되는 사탄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말을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어 보내어 그 죄를 청산하는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실락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구해야만 되는 것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속죄의 길을 마련하시고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시행하고 계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게 심판 가운데 구원을 베풀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를 간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을 영위하자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살 때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냥 남들처럼 그렇게 편리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구하고 찾아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초대교회 시대에는 생활공동체인 신앙공동체의 삶으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과 수녀원과 같은 삶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주의 현대사회에 살면서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이 미리 정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시고 있습니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9-11),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라도 먹이고 입히십니다.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 응답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6:11-13).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의 본문말씀에 대하여 한 구절 씩 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 가운데 깨달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함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죄악 가운데)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1-24);

(1)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하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을 호소하고 있는데(3:20)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들어주고 계실까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은연중에 대답하고 있습니다(3:21). 인간의 원죄를 가리어 주고 다시 영생의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일 것입니다(3:15). 그렇다면 아담은 하와의 후손이 먼 훗날 그들을 구원해줄 것이기에 그 뜻을 미리 담아서 아내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작명(作名, 이름을 짓는 것)의 대가(大家, 으뜸이 되는 전문가)가 아담인 셈입니다. 참고로, 그 내용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2)  본문 제21절부터 제24절까지는 한마디로, 가죽 옷과 생명나무의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치부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는 가려지지가 않습니다(3:7). 사람의 눈을 가릴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21). 요컨대, 어린 양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그 치부를 가릴 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제(儀制)의 방법이 유월절 사건으로 출애굽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월절 밤에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십니다(11:5-6, 12:29). 그렇지만 어린 양의 피가 그 집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 문을 가려 주십니다(12:13, 23). 죽음의 천사가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집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3)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영적으로 성도에게 임하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죄를 묻지 아니하고 죽음의 심판을 가려 주십니다(5:29, 6:53-57).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6-8).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여기서의 가죽 옷이라고 하겠습니다(3:21).

(4)  하나님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마저 따먹고서 죄 가운데 영생하게 되는 비극을 지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22.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죄악 가운데)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3:22). 그래서 두 가지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보냅니다(3:23). 동산의 바깥에 나가서 땅에 식물을 경작하면서 먹고 살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아담과 하와를 막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5)  에덴동산에는 출입문이 동쪽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막이나 예루살렘성전과 동일합니다(38:13-16, 43:1-2, 47:1). 그 출입문으로 접근하는 길을 아예 차단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에도 멀리 쫓아내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허용하시기 전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 길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음과 같이 뚫리게 됩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6)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안내하는 그 천국에 드디어 그 옛날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다음과 같이 열린 것입니다; “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2:1-2). 결국, 창세기의 기록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연결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11.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12.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후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1-16);

(1)   아들이 둘인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11).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아들은 흔하지가 않습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재산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것이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에 자신의 몫이 당연히 들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것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12a). 그것은 두가지의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아버지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아버지의 것인데 둘째 아들이 중의 일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재물의 탕진입니다.

(2)   그렇게 잘못된 요구를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말을 아버지가 어째서 그대로 들어주고 있는 것일까요?(12b)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것일까요? 그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이 재산을 얻어 다른 나라로 가서 탕진하고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어렵지 아니하게 짐작하고 있는 자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청을 들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해답을 이야기의 전환점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들에서 돼지를 치게 되는 아들이 매우 굶주리고 있습니다. 굶어서 죽을 지경이 되자 옛날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은 체험을 해보지 아니하면 확실하게 수가 없는 소위 돈으로 없는 소중한 깨달음입니다”(15:13-20).

(3)   예수님께서는 비유 가운데 아버지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13). 나라는 어떠한 나라일까요? 마디로,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곳과는 아주 다른 나라이며 돈으로 환락을 누릴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나라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나라는 돈을 주고 유흥과 환락을 즐길 있도록 세상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마치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세겜과 같은 성읍입니다(13:10-13, 33:18-20). 일찍이 그곳에서 롯과 야곱이 악한 사회에 휩쓸리고 패가망신을 당하게 되는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습니다(19:15-16, 34:25-30). 그와 비슷하게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낭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4)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흉년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차례나 외국으로 이주합니다. 애굽과 블레셋의 그랄 땅이 그러합니다(12:10, 20:1). 나라에서 아내 사라를 최고권력자의 후궁으로 빼앗길 뻔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12:15, 20:2). 둘째, 이삭은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블레셋의 그랄 땅으로 이주를 합니다(26:1). 역시 아내 리브가를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26:7-8). 셋째,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계속되는 가나안 남부의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총리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민을 떠나고 맙니다(45:9-11).

(5)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고 나자 돈이 떨어집니다(14a). 이제는 일자리를 찾아서 먹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고 있습니다(14b). 일자리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과 탕자는 들에서 돼지를 치는 일이라도 하여 생존을 하려고 합니다(15). 참으로 비참한 처지가 되고 것입니다. 들판에서 돼지가 먹을 것이 없는 계절이 있습니다. 겨울철입니다. 그때에는 주인이 돼지먹이로 쥐엄 열매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해에는 혹독한 가뭄으로 흉년이 심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양식도 부족하고 돼지에게 먹이 쥐엄 나무의 열매도 공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굶주린 사람들이 도시에서 쥐엄 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들판에서 돼지 떼도 굶고 있고 탕자도 굶주리고 있습니다(16). 그대로 들판에 계속 있다가는 죽고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자 탕자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극심한 흉년이 탕자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향하게 만들고 있는 입니다(15:17-20).

(6)   여기서 쥐엄 나무’(하루빔 나무, locust tree) 열매는 이방 땅에서는 돼지의 먹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돼지 사육을 하지 않습니다(11:7-8). 따라서 쥐엄 나무의 열매를 돼지 먹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흉년이 심할 때에는 열매를 마지막 식량으로 사용합니다. 쥐엄 나무의 열매가 녹색일 때는 떫어서 먹지를 못하지만 완전히 익게 되면 갈색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열매로 죽을 끓여서 먹게 됩니다;

 당분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약간 단맛을 내면서 식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쥐엄 나무를 찾아서 열매를 식량으로 사용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열매를 먹었다는 의미에서 메뚜기를 먹었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유로 유대인들은 쥐엄 나무의 열매를 ‘st. John’s bread’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쥐엄 나무의 열매에는 10-15개의 씨앗이 들어 있는데 하나의 무게가 0.2g으로서 게라 단위입니다. 그것이 보석의 무게  케럿 원형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 아버지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17-24);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탕자의 깨달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길을 찾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17-20). 하나는,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용서하고 기쁘게 아들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21-24).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봅니다;

(1)   회개 번째 요건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돌이키는 입니다(17a). 그러므로 강압적으로 억지로 돌이키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이치에 맞지 아니한 요구에 순순히 응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재산을 떼어주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세상나라에 나가서 탕진할 것이 뻔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렇게 설명하고서 재산을 주지 아니하게 되면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동시에 세상나라를 동경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재산을 떼어주고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재산은 탕진하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 얻게 되는 보석과 같이 영롱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난 세상나라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흉년과 굶주림이 어떠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신 나라의 풍요로움을 깨닫게 됩니다(17b). 이제는 스스로 결단하고서 아버지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길만이 세상나라에서 굶어 죽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생명을 얻을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것입니다(17c).

(2)   회개 번째 요건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나라에 주저 앉는 것이 아닙니다. 과감하게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입니다(18a). 비록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18b).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5:18b) 라고 하는 구절은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함이 무엇인가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이 패륜입니다. 둘째,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 반역입니다. 지금 탕자는 하나님께도 그리고 아버지께도 모두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첫째,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은 상속을 미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12). 부친이 돌아가시지도 아니했는데 사망후에 받도록 되어 있는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으니 그것이 불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는 패륜아와 같은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잘못 주장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3). 모든 재물은 사실 하늘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것을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탕자는 그것이 자신의 소유물인 줄로만 알고서 그만 세상나라에서 탕진하고 말았으니 죄가 것입니다.

(3)   탕자(蕩子) 자신의 잘못과 죄가 얼마나 것인지를 깊은 차원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버지를 아버지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오직 재산을 상속해주는 사람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재산이라도 없었으면 자신이 어떻게 아버지를 대했을까요? 그런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인연을 끊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디로 배은망덕한 아들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나라에서 여러가지 재미를 보느라고 시간과 재화를 모두 소진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잘못 살아간 것입니다.

3)      셋째, 결과 탕자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고개를 수가 없습니다. 속죄의 방법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의 신분을 내려놓고 오로지 품꾼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19). 그러한 생각과 각오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고 있는 자가 바로 회개한 탕자입니다.

(4)   탕자는 세상나라를 떠나서 아버지가 계시는 나라로 되돌아갑니다(20a). 아버지의 집이 가까워지자 자꾸만 자신의 죄가 생각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아버지의 집이 있는 동네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여러 해가 흘렀기에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멀리서 사람의 노인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이도 늙으신 아버지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마음을 빨리 늙게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죄스러워서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모습을 보고서 아들을 향해서 달려 나온 아버지가 다짜고짜 아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둘째 아들의 모습이 상당히 초췌하게 변해 있다고 하더라도 금방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언제나 집을 나간 아들이 찾아오는지 동구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어찌 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멀리서 보고서도 단숨에 둘째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서 힘껏 달려온 것입니다(20b). 돌아온 탕자의 몰골과 행색이 불쌍하기 그지 없습니다(20c). 그래서 가슴이 아픈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습니다(20d). 아버지의 눈물을 보고서 그만 아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맙니다.

(5)   21절부터 24절까지는 이미 말씀드린 그대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용서하고 기쁘게 아들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자신이 죽지도 아니했는데 둘째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보다는 재산상속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섭섭합니다.

2)      둘째, 잘못 생각하고 있는 차남을 혼을 내려고 하다가 그만 둡니다.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재발을 방지할 있는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      셋째, 방법이 바로 재산을 떼주어서 소원대로 세상으로 나아가서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아니나다를까 차남은 이웃나라로 가서 세상적인 유흥과 향락을 즐기다가 재물을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돼지를 치면서 연명하고 있습니다.

5)      다섯째, 나라에 흉년이 들자 굶주리게 됩니다. 그때서야 살길을 찾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탕자는 후회막급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으며 받은 재산마저 탕진한 처지인지라 차마 아들로 다시 받아들여 달라고 하는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품꾼으로라도 일할 있도록 부디 자신을 받아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1).

6)      여섯째, 모습을 보고서 아버지는 흔쾌하게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입니다(22-23). 이유는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 나간 아들이 세상살이 가운데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서 살길을 찾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신 아버지이십니다”(15:24a 의역).

7)      요컨대, 이제 다시는 차남이 이웃나라로 가서 세상의 낙을 즐기겠다고 인생과 재물을 낭비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관리하게 되는 신실한 아들이 것입니다(24b).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장차 온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합니다(28:18-20, 8:19-22).

(6)   특히 22절에서는 신분을 상징하고 있는 고대사회의 가지 신물(信物)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의복입니다. 둘째, 가락지입니다. 셋째, 신발입니다(22);

1)      고대사회에서는 왕의 옷과 신하의 옷이 다릅니다. 옷의 디자인도 다르지만 우선 색깔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왕족들은 염료 값이 비싼 자주색의 옷을 입습니다(16:19, 16:14). 그리고 신하들도 계급에 따라서 색깔이 다릅니다. 주로 붉은 , 푸른색, 녹색 등의 순서가 되고 있습니다.

2)      왕의 가락지에는 직인(職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장(印章, 도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그에게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자신의 가락지를 빼어서 주고 있습니다(41:42).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황제가 처음에는 재상인 하만에게(3:10), 나중에는 중신(重臣) 모르드개에게 역시 자신의 반지를 맡기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8:2).

3)      고대사회에서는 신발 값이 비쌉니다. 따라서 어떤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있는가 하는 것이 신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아버지가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에 맞는 신발을 신겨주고 있는 것입니다(22).

(7)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여 집으로 돌아온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의복과 가락지와 신발을 가져다 주라고 합니다;

1)      말은 탕자의 신분을 본래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아들을 역시 상전으로 섬기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아버지가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이유는 마디로,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다시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가출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나라의 유흥과 환락을 동경하여 재물을 가지고 집을 나서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겜 성에서 말년을 즐기려고 했던 야곱이 회개하고서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33:18-20, 34:30, 35:1-15).

(8)   고대사회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고기로 사람을 대접한다고 하는 것은 최상의 대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23a). 예를 들면, 헤브론 마므레 수풀에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고 계시는 여호와와 천사를 아브라함이 융숭하게 대접한 경우가 그와 같습니다(18:7-8).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을 혼자서만 맛보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친지와 종들과 함께 즐기고자 합니다(23b). 그것은 첫째, 아버지의 기쁨이 엄청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완전히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서 신원회복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널리 공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천국잔치를 크게 베푸시면서 탕자를 아들로 맞아들이고 있습니다(15:23, 24b). 그리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계십니다;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15:24a).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는 가운데에는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타국에서 세상의 유흥과 환락에 파묻혀서 평생을 지내게 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과감하게 세상나라를 떠나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자 것이 다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탕자의 비유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아버지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재물을 자신의 소유인줄 잘못 알고서 세상나라에서 함부로 낭비하고 탕진해버리고 있는 불충한 종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세속적인 재미에 취하여 마냥 살아가게 되면 영적으로 죽어버리는 자가 되고 것입니다(11:26, 32, 12:4, 7:4, 하란에서 60년을 살고 있는 족장 데라 집사 스데반 영적으로 죽은 라고 보고 있음). 그것은 영원히 천국에서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을 다시 얻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훗날 그들이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영생의 나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베풀어준 기쁨의 잔치가 천국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미래를 소망하면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