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용서에 관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증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6. 11:49

제목; “용서에 관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증언”(고후2:5-13)

설교일; 주후 202352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516일 화요일 작성)

 

오늘 강해설교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제2장 제5절에서 제13절까지입니다;

 그 대목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여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16:19)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안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는)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후2:5-13).

본문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율법선생 곧 랍비 사울이었던 사도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고 이방인 사도가 되어 생활하면서 자신이 깨닫고 있는 복음의 의미를 전통적인 히브리경전의 해석과는 달리 진술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영적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한편 그가 익히 알고 있는 히브리경전의 뜻에 대하여 복음에 따른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천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전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영원한 화해와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 곧 남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먼저 얻으신 부활과 영생의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그때부터 랍비 사울은 주님의 종 바울이 되어 남은 인생을 오로지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작성하여 고린도교회에 전달하고 모든 초대교회에 회람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에는 오늘날 성도들이 읽고 있는 구약 곧 히브리정경에 대한 복음적인 재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선 본문말씀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그 깊은 의미 곧 요지(要旨, substance)를 나름대로 파악하여 먼저 제시하고자 합니다.

간단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하여 징계보다는 책망을 하는 선에서 그치라. 그리고 나는 복음을 위하여 벌써 용서하였으니, 너희들도 용서와 포용을 선택하라. 이는 그들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디도가 그 일을 위하여 나의 서신을 고린도교회에 전달하고 있다”(고후2:5-13의역);

히브리정경의 앞부분 특히 모세가 기록한 오경에 따르게 되면, 창세기에서부터 두려운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심판으로서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6:5-8, 7:10-24). 그렇지만 무지개언약으로 말미암아 전면심판은 보류가 되고 다음부터는 국지적인 심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9:11-17).

대표적인 것이 의인 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등지에 임하고 있는 불 심판입니다(19:24-25, 29:23). 그와 같은 히브리경전 창세기의 말씀을 가지고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에 등장하고 있는 불법한 자와 같이 육신의 탐욕을 쫓아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다같이 말하고 있습니다(벧후2:8-12, 고후2:6).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서 그들마저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더 세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을 구절풀이에 앞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살아생전에 그들에게 전달이 되지 아니하여 단지 노아의 가족 8사람과 롯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홍수심판과 불심판으로 말미암아 전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 점을 사도 베드로의 기록 베드로후서 제2장 제5-12절 말씀을 참조하면 그는 생생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사도 바울은 그 의미만을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고후2:6). 그와 같은 차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방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보다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자신과 같은 생전의 배척자를 용서하시고 사도로 살아가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임하고 있지만 끝까지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고 복음을 전달하고 있는 성도들마저 핍박하게 되면 세상의 심판과 더불어 영벌에 처해지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벧후2:9-10). 그것은 노아의 시대나 롯의 시대나 교회의 시대나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본문 제6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생전의 사도들로부터 전해 듣고서 그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16:19);

따라서 땅에서 먼저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라고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고후2:9-10).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자신과 교회를 근심되게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대속의 뜻을 자신의 인생 가운데 실천하는 방안이기 때문입니다(고후2:8-11).

(3)  셋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러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며 그들을 단칼에 물리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역사가 고린도교회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 편으로 그 결과를 받아보고서 소아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건너가고자 하였으나 지금은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고후2:12). 그 점을 아쉬워하면서 이 글을 적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훗날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2:1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아울러 말씀의 묵상 가운데 깨달은 교훈을 함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고후2:5-6);

(1)  마태복음 제5장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 한절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43. 또 네 이웃(동족인 선민 이스라엘)사랑하고 네 원수(이방인)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43). 유대인들은 이 세상사람들을 선민과 이방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선민은 여호와의 구원의 대상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멸망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민사상에 따르게 되면 사도 바울의 복음선교에 있어서 그를 이유 없이 비방하거나 대적하고 있는 적들을 전부 이방인으로 구분하여 멸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미워하면 그 뿐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입니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사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같은 마태복음 제5장에서 그 뒤를 이어 계속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5:44-48). 따라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아주 조심스럽게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자인 나 바울의 하나님 말씀의 해석에 대한 영적 권위에 대하여 비방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나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 사도로서 내가 개척한 초대교회의 성도들 전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들이 그와 같은 시비를 그만두지 아니하고 계속하게 되면 초대교회 전체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고후2:5-6 의역).

둘째로,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여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16:19)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7-11); 주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5:44-48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대목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3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여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노라”(고후2:7);

1)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과 배척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다음의 수순이 무엇일까요?(고후2:7b) 그 점을 가룟 유다의 경우에서 정확하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스승을 반대파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기면서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은 스승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신임하지 아니하고 그저 은 30을 주고서 외면하고 맙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절망합니다. 배신자이며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 돈으로 밭을 사고 그곳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맙니다(27:4-5). 그렇게 결말이 나면 그는 부활하여 영벌의 심판에 처해질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결말에 이르기 전에 자신을 배척하며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의 기회와 회개할 기회를 주라고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2:7a). 왜냐하면,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대목에서 생전에 주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주신 판결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시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7-11);

(2)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16:19) 한 것이니”(고후2:8-10);

1)    사도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사랑은 창조주 여호와의 아가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8). 그 사랑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십니다. 선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까지 구원하자면 그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화목의 제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5:8-11).

2)    그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실토하면서 남은 인생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에게는(16:24) 죄의 용서칭의의 은혜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있습니다(16:25). 그리고 의인으로 여김을 받은 성도의 심령속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적인 도움을 받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빛의 자녀 답게 한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4:16-20, 8:1-6). 곧 아버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을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웃으로 여기고 제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3:4, 12:30-31).

3)    요컨대, 사도 바울의 말은 멸망으로 들어가기 전에 용서하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실천하신 아가페 사랑과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사도 바울이 실천하고 있습니다(8-10);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구체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평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과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는 성도의 그 증거입니다(9).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그 일에 격려하고 모범을 보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10).

4)    둘째, 생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치고자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아니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 하늘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6:19). 그와 같은 취지에서 사도 바울이 특히 제10절 후반부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1);

1)    사탄은 굉장한 능력자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탄 곧 마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생명을 해치고 영원히 멸하고자 합니다. 그와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멸망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독생자를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사탄에게 속아서 끝까지 자신을 비방하는 성도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여기서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밖에 사탄의 특징은 둘째, 멸망에는 앞장을 서고 있지만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잠시 구원을 하는 척은 할 수가 있지만 결국에는 그 추종자들을 전부 멸망으로 끌고 들어갈 뿐입니다. 셋째, 역시 영적인 존재이므로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인간의 미래까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밀을 은밀하게 속삭이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추종자 또는 하수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넷째, 사탄은 창조주가 아니기에 그가 알고서 사람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말은 진리와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점을 마귀의 화신인 에덴동산의 뱀에게서 여실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3:4-5). 구체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사람들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5). 그러나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마귀는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거짓말을 먼저 하고 있는 것입니다(4);

셋째로,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안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는)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후2:12-13);

(1)  사도 바울은 먼저 고린도전서를 작성하여 디모데에게 그리스반도 남단의 대도시 고린도교회에 전달합니다(고전16:10-11). 그 다음에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합니다(고후2:1, 5-11). 그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의심하고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사도 바울이 마음속으로 근심합니다.

(2)  따라서 그는 자신이 신뢰하고 있는 디도 에베소에서 만나 그를 고린도교회에 파견하고 있습니다(고후7:8). 당시 디도 고린도교회의 당면문제들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서 떠난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결과를 알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서쪽 항구 드로아에서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그것이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고후2:12-13).

(3)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처리하고서 디도는 그리스반도의 북쪽으로 이동하여 마케도니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고후7:6-15). 그리고 디도는 본서 고린도후서를 고린도교회에 전달하게 됩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의심하고 비방하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용서와 관용으로 대하였기에 주님의 은혜로 그 교회에 화평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가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서 그가 주안에서 근심하고 기도하고 있던 문제가 벌써 해결이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비방하고 있는 무리들에 대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맞서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선택하신 그 방법 곧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간구하였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감격스럽게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고린도후서 제7장의 다음 내용입니다. 그 말씀을 아래에 옮겨 적는 것으로 오늘은 저의 강해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다음 말씀을 한번 깊이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고후7:6-16).

참고로, 대략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1)  사도 바울이 디도 편으로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그 서신을 읽고서 성도들이 잠시 근심하였으나 이내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이 주님 안에서 서로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큰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6-9).

(2)  반대로, 세상적인 염려로 근심하는 것은 구원의 기쁨이 아니라 절망적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10).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근심하고 염려를 모두 맡겨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역사로 성도들이 거룩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으며 서로가 기쁨과 위로와 안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11-13). 그것이 복음의 실천이며 성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11).

(3)  사도 바울은 자신이 디도 편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글이 기쁨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으로 그의 권면이 참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14).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디도가 전한 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였다고 하니,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이제 그곳의 성도들을 신뢰하며 동시에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 디도를 그들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5-16).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