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사도 요한이 노년에 얻은 놀라운 헬라 학문과 창조주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2. 17:30

제목; “사도 요한이 노년에 얻은 놀라운 헬라 학문과 창조주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1:1-18, 참고구절 창1:1-5)

설교일; 주후 202352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522일 월요일 작성)

 

신약성경에는 4권의 복음서와 1권의 역사서 그리고 22권의 서신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막내제자로 불리고 있는 사도 요한이 노년에 작성한 것이 제4복음서와 4권의 서신서입니다. 이름하여 요한복음과 요한1, 2,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5권이므로 그 비중이 무려 18.5%입니다. 그 수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서신서 13권 다음으로 많은 저술의 분량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사도 요한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도 바울은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사상에 박식한 랍비 출신이지만  사도 요한은 본래 히브리경전에 대한 학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사도 요한사도 베드로와 더불어 학문이 없는 보통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4:13).

(2)  둘째로, 바울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전통적인 유대교에 대하여 열심이 대단한 바리새인으로서 그 이름이 사울입니다(8:3, 9:1-2, 26:5, 3:5-6). 그는 10대 소년시절부터 예루살렘의 유명한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10년 이상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사상을 배우고 익혀서 30세가 되자 랍비 시험에 합격한 수재입니다(22:3). 그러므로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적으로 자신에게 임재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이방인사도가 되어 활동하면서 히브리경전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해석하여 많은 서신서를 남기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전혀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그는 유대 땅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로마의 대군이 주후 70년에 쳐들어왔을 때에 스승 나사렛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 에베소로 피난을 간 인물입니다. 그때 사도 요한의 나이가 60대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후 90년대에 들어서자 갑자기 헬라 학문에 정통하여 요한복음을 저술하고 헬라어로 기타 서신서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학문이 없던 청년 사도 요한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하여 그가 노년에 헬라 학문을 배우고 더구나 히브리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그러한 놀라운 복음서와 서신서를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3)  셋째로,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도 요한이 비록 헬라 학문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헬라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히브리사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 제1의 내용입니다. 차제에 중요한 3가지 설명을 덧붙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장 제1절 가장 첫머리에서 ν ρχ’(엔 아르케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아르케이는 사실 희랍의 철학 용어입니다.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에너지 또는 영적인 원리인 아르케이는 그 자체가 이 세상에 투영이 되어서 물질적인 현실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희랍의 영지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깊은 명상 가운데 아르케이의 운동법칙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가 초월자인 철학의 왕입니다. 그 철학왕이 통치하는 세상이 가장 이상적인 나라입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일반의지를 가지고 초월자인 천재 철학왕이 건설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희랍의 철학에 있어서는 창조주가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헬라 사상의 기본은 무신론(無神論)입니다. 그들은 그저 많은 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범신론은 실제로는 무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랍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념과 탐욕을 신들에 대입하여 신들이 어떻게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있는지를 꾸며서 이야기하고 그 스토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무신론적인 희랍의 철학이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헬라 세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희랍의 철학과 헬라의 문화를 대제국 로마가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도 요한이 노년에 20년 세월을 투자하여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고 익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지인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내용은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인간역사에 개입하심에 대하여 헬라어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비록 희랍의 철학적인 용어 아르케이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철학적인 아르케이를 초월하고 있는 창조주 여호와의 존재양식과 그 창조의 비밀을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논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모세가 주전 15세기에 기록하고 있는 오경 가운데 첫번째 저술인 창세기 제1장에 있어서는 창조주 여호와가 피조세계를 만드는 그 최초의 시점을 히브리어를 사용하여 베레쉬트’(בְּרֵאשִׁית)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 그리고 6 동안 여호와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과정을 1장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첫머리의 희랍어 아르케이’(ν ρχ)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피조세계의 최초시간이라는 베레쉬트에는 창세 이전에 있어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31체의 신비가 별로 언급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사상에 정통한 랍비 출신 사도 바울조차 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가 못한데 어떻게 노년의 사도 요한이 헬레니즘을 배우면서 헤브라이즘과의 차이를 그렇게 창조주의 신비로 생생하게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노년의 사도 요한의 인생을 섭리하여 헬라 학문을 익히게 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며 특별한 배려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요한복음 제1장 제1절부터 제18절까지를 본문으로 삼아 창세기 제1장 제1절부터 제5절까지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그러한 점들을 한번 강해 설교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본문에 대한 묵상의 결과 얻은 소중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함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5. 빛이 (이 세상과 육신의)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1-5);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1-2);

1)    주전 3세기 중반에 헬라의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고 있는 애굽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모르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이 그곳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모세오경을 먼저 번역하고 그 다음에는 기타 히브리경전을 주전 1세기까지 차례로 번역하게 됩니다. 나중에 수합해보니 72명의 율법학자들이 그 번역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기념하여 최초의 헬라어 번역본을 70인역’(라틴어로는 Septuaginta, 영어로는 Septuagin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4:1). 70인역에는 신교에서 구약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히브리정경 39권보다 더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카톨릭에서 구약성경으로 함께 사용하고 있는  소위 외경들입니다.

2)    히브리경전에서는 창세기 제1장 제1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태초에라고 하는 히브리어 בְּרֵאשִׁית의 발음이 베레쉬트입니다. 그것을 70인역에서 헬라어로 번역하여 ν ρχ라고 적고 있는데 그 발음이 엔 아르케이입니다. 영어로는 동일하게 in the beginn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국어 성경에서는 태초에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제1장 제1절에서 헬라어 ν ρχ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다음에 그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참조하면 그것은 본래 헬라어 엔 아르케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대로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을 어렵지 아니하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4)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장 제1절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먼저 선언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서두의 태초에’(בְּרֵאשִׁית)는 창조주 여호와에 의하여 피조세계가 탄생한 그 최초의 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사실 히브리어 베레쉬트의 뜻도 그러합니다; ①첫째, ‘’(בְּ)가 헬라어로 ν영어로는 in에 해당합니다. ②둘째, ‘쉬트’(רֵאשִׁית)는 시간적으로 시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장 제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헬라어 엔 아르케이’(ν ρχ)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5)    사도 요한은 헬라어 아르케이(ρχᾖ)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아르케이(ρχᾖ) 시간적으로 최초의 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속성 말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앞에 전치사 ’(ἐν)이 붙어 있으므로 엔 아르케이’(ν ρχ)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영원한 창조주의 신비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구태여 시간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창조 이전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의미를 사도 바울이 잘 사용하고 있는데 그의 에베소서 제1장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4. 창세 전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항목을 달리하여 조금 설명을 해봅니다.

6)    사도 바울이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1:4a).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 성도들의 생명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설명하고 있습니다(1:4b). 더구나 성도를 선택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계획이 벌써 창조 이전에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말하고 있습니다(1:4c).

7)    그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기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 영원한 시간 속에 말씀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과 항상 함께 계시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격의 하나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의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1-2의역).

(2)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5. 빛이 (이 세상과 육신의)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한 위격인 말씀이 이 세상만물의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3).

2)    둘째, 피조세계의 모든 생명은 본래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4a).

3)    셋째,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창조할 때에 영원한 창조주의 말씀 안에 있던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 생명의 빛을 따라 살아가도록 조치했습니다(4b).

4)    넷째, 그러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생명의 빛을 외면하고 있습니다(5). 이제 타락한 세상, 육신적인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가 있을까요?

둘째로,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6-13);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6-8);

1)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고 있는 땅에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들이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선지서와 역사서에 등장하고 있는 그들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어느 날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위탁 받고 그것을 동족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세례 요한의 경우는 그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2)    누가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늙은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늙은 아내이며 평생 불임 여성이었던 엘리사벳이(1:5-7) 합방하여 노년에 창조주 하나님의 예언과 능력에 의하여 탄생한 선지자입니다(1:13-20, 36-37, 80, 3:2-15). 세례 요한의 탄생은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100세의 아브라함과 불임 여성이었던 그의 아내 90세의 사라가 창조주 하나님의 예언과 능력에 의하여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의 경우와 같습니다(17:15-19, 18:10-14, 21:1-7).

3)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마치 그 옛날 이삭처럼 약속의 아들이며 부모가 모두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즉 생물학적인 부모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말씀의 빛이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고 있습니다(8). 세례 요한은 창조주의 한 위격인 말씀의 오심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증언하고자 미리 이 세상에 선지자로 태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7).

(2)  9. 참 빛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9-11); 사도 요한이 창조주 하나님의 한 위격인 말씀의 존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제1장 제1-5절에서 벌써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헬라인들이 흔히 로고스(Logos) 신으로 알고 있는 창조의 신 말씀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은 영적인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창조주 하나님의 한 위격인 말씀을 참 빛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9).

2)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그 위격이신 말씀은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세밀한 창조를 담당하셨습니다(10a).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10b).

3)    셋째,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세상구원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말씀이 사람들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고자 스스로 성육신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하지만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백성들의 행태는 여전합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1)    선민 유대인들은 이상한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대교의 교리로 볼 수 있는 선민사상은 한마디로,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에 의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13a).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19:4-6). 그러므로 이스라엘 곧 야곱의 혈통이 바로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조건입니다. 둘째, 선민은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생산하더라도 그것은 육정에 의한 것이므로 부계를 따라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으로 선민을 섬기겠다고 그 종이 되는 경우에는 역시 여호와의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2)    그와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구원을 얻는 자의 특징은 한마디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3b)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구원, 정욕에 의한 구원, 사람의 뜻에 의한 자력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오로지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창조주의 한 위격이신 스스로 계시는 말씀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여 전하여 준 그 구원의 복음을 믿고서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오로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영원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대속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며 영생의 상급이 주어지고 있다고 사도 요한이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12).

셋째로, “14. 말씀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4-18);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4. 말씀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14-15);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a)에 대해서는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그의 복음서 제1장의 성육신의 방법과(1:30-38)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는 장면(3:21-22)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3:23, 4:1-21:38)을 참조하면 넉넉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의사 누가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하여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b)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독생자’(獨生子)의 의미는 외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결국 여호와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3:14). 그리고 그 정체가 창조주의 위격인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성육신과 공생애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말씀의 진리를 충만하게 전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14b).

3)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자이며 창조주의 한 위격이심을 세례 요한이 아주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언이 바로 나사렛 예수가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곧 그 어떤 피조물보다 창세 이전에 먼저 계신 분이라는 설명입니다(15).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빌려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가 바로 창조주의 한 위격이며 이 세상에 성육신하시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공생애를 살으셨다는 사실을 계속 무신론자들인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6-18);

1)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모세의 율법그리스도의 복음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로부터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준 율법은 창조주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법률 체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강제적인 법규정과 같이 딱딱한 조항들입니다. 그와 달리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고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독생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온유한 것입니다”(1:16-17의역).

2)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출애굽기 제33장 말씀 한구절을 참조하면 피조물은 그 육체를 가지고 영적인 존재인 창조주의 실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죽임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33:20). 그런데 여호와를 대면할 수 있는 방법이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을 가지시고 현신(epiphany)하시는 것입니다(18:1-2).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 뿐입니다.

3)    그렇다면 오랜 기간 창조주 여호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 방법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독생자가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함께 자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 속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여기서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제1장 제1절에 기록되어 있는 태초에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그 의미가 최초의 창조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표현 in the beginning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그의 복음서 첫머리의 표현 헬라어 엔 아르케이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것은 영원에 속하는 창조 이전에라는 뜻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노년의 사도 요한은 희랍의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영적인 용어 엔 아르케이를 사용하여 창조 이전에 창조주 여호와와 함께 거하고 계시는 로고스 말씀의 존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인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창조주 여호와가 살아 계시며 독생자가 이 세상에 구원자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학문이 없던 사도 요한이 60대의 노인이 되어 소아시아 에베소에 거주하면서 80대가 될 때까지 무려 20년 세월을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여 그의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무신론자들 곧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창조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제1장에 있어서는 창조 이전에 보유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역시 이 세상의 창조에 참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독생자가 구원주로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안에 진리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주의 생명의 빛이 영적으로 충만하게 비추어 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말씀의 진리 그리고 생명의 빛을 오늘도 흡족하게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