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할례를 잊어버린 모세와 할례를 기억하고 있는 십보라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5. 01:17

제목; “할례를 잊어버린 모세와 할례를 기억하고 있는 십보라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4:24-26)

설교일; 주후 2023430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25일 화요일 작성)

 

기독교성도들이 오늘날 읽고 있는 성경말씀은 신약과 구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약(新約, New Testament)은 그 구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생에 대한 기록인 복음서와 그에 대한 설명의 글들입니다. 그리고 구약(舊約, Old Testament)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소위 39권의 히브리 정경(政經, Cannon)입니다;

기독교성도들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며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거듭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인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그 제자로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만인데 어째서 유대교인들의 정경인 히브리경전을 구태여 구약으로 배우고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구약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세오경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이란 약 347십년 전  여호와의 명령으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제국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광야생활 40년동안 여호와신앙인으로 만들어간 최고지도자 모세가 저술한 히브리 경전입니다;

율법서로 알려지고 있는 모세오경의 주장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주 여호와가 모세를 보내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고 그들에게 여호와를 모시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정말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을 출애굽기 제19장에서 찾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4-6).

한마디로, 이 세상에 많은 족속이 있지만 유일하게 창조주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은 족속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족속들은 전부 이방인이며 창조주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여 주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방인들은 그 옛날 히브리인들을 압제하고 노예로 부려먹은 애굽 사람과 같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 이방인들은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종래에는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사상이 유대교리를 형성하고 그들의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수많은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의 주옥 같은 글들 곧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역사서와 선지서 그리고 성문서들을 해석하는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종래 그를 핍박한 후에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해버린 그들 가해자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정경을 구약말씀으로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

그러한 의문에 대하여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대목이 사실은 유대교의 교리 선민사상의 핵심을 잘 말하고 있다고 하는 출애굽기 제19장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신앙인이 되자면 사실은 두가지 중요한 조건을 우선적으로 만족시키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가지 조건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19:5). 둘째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창조주 여호와께 대하여 제사장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간 그 모범을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9:6);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같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방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들입니다(12:1-5, 26:1-6, 28:10-22).

둘째, 창조주 여호와의 선지자로 이방 땅에서 살아감으로써 그들에게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가르쳐주고 또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한 인물들입니다(18:22-32, 20:7, 17-18, 21:1-33, 26:28-31, 31:44-55, 47:7-10).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살아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막을 모시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매년 대()속죄일에 드리고 있는 제사로 자신들의 죄악과 허물이 여호와 앞에서 해마다 용서를 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16:29-34);

 

아무도 이방 땅에 나아가서 여호와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지 아니하고 있으며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거나 속죄의 제사를 드려 주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독점하고서 이방인에게 전해주지도 아니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방 족속들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 뜻을 모르고서 제멋대로 살아가다가 모두 여호와의 진노로 역사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유대인사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 옛날 선지자 요나의 일을 기억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12:39),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6:4);

여기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유대인사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이방인 선지자의 삶을 도무지 살아가고 있지 아니하다는 질책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서 마치 아사셀의 염소’(贖罪羊, scapegoat)처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2:40, 16:8-10);

물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는 선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1:16-17).

그와 같은 의미의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이 히브리경전에 풍성하다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계십니다(24:44-49). 그와 같은 측면에서 히브리정경 곧 구약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그 속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제역사가 여호와신앙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그들의 친척들 곧 데라의 자손인 제사장 (1:1, 22:21),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형제들과 그 자손들(21:17-20, 25:1-6, 2:16, 18:1-12), 그리고 이삭의 아들인 에서의 자손들(36:9-11, 2:11-13)에게 있어서도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생생한 대목이 오늘 본문으로 선택하고 있는 십보라의 이야기입니다. 정작 여호와의 일꾼으로 선택되고 있는 모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제도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그 반면에 그의 아내인 미디안 족속 십보라가 도리어 할례제도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하면서 본문말씀을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말씀의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자신이 할례의 중요성을 소홀하게 생각했으며 그 때문에 여호와의 징벌을 받을 뻔 하였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4:24, 26). 그 의미는 세상제국 애굽에서 430년간 살아오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여호와의 말씀에서 멀어진 삶을 살아오고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도록 제도화가 되어 있습니다. 할례제도는 이삭이 태어나기 1 전에 처음으로 실시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으며 서장자인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17:24-25). 그리고 할례의 제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자에게도 할례는 적용이 되었습니다(17:12). 그러한 제도적인 특징 때문에 훗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이 있는 방법이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심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브라함처럼 마음 속에 할례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0:16, 2:28-29, 15:19-21);

할례제도가 시행된 이듬해에 아브라함의 집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 출생을 합니다. 그는 최초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는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21:4). 아직 고통에 대한 기억을 남기지 아니하고 있는 갓난아기 시절에 포경수술을 받을 있다는 것은 특혜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태신앙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아들 이삭의 영적인 장자라고 말할 있는 야곱 이스라엘(32:28, 35:10) 자손들이 애굽 제국 고센 땅에 살면서 그만 할례제도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400 이상을 족속의 거대한 제국에 살면서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종교적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동화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실시를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독실한 집안에서는 할례제도를 갓난아기 때에 슬쩍 실시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그러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금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세의 가정에서 발견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사명을 받은 모세는 신나게 미디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4:20).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지니고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자 숙소에 들었습니다(4:24a). 그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현신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4:24b);

모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시는지 이유를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할례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후에 밝혀집니다(4:26).

그렇다면 대목은 모세가 얼마나 애굽인처럼 되어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배워야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둔감한지 그의 아내인 십보라와 대조적으로 비교가 정도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는 그의 부모인 레위 족장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만큼의 하나님 신앙심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6:18-20). 그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에 그에게 할례를 행해 주셨는데 모세는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아니하고서 살고 있습니다.

결과 갓난아기인 둘째 아들을 할례도 행하지 아니하고서 함께 데리고 애굽으로 향하고 있다가 도중에 하나님의 뜨거운 경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4:20, 18:4). 대목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어서 그리고 성도들에게 있어서 출애굽 뿐만 아니라 이후의 신앙훈련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모세가 정도의 영적인 안목밖에 지니고 있다면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과제가 것임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훗날 이방인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미디안 족속 가운데 제사장 이드로의 딸인 십보라가 오히려 할례제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미디안 제사장 집안의 신앙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4:25-26).

모세는 40세에 도망자가 되어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서북쪽 지방 미디안 땅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십보라 만납니다. 그녀와 결혼을 함으로써 모세는 신변의 안전을 얻게 됩니다(2:21). 그리고 장인 이드로를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방법과 광야에서 백성을 이끄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사상에 어긋나기 때문에 많이 생략이 되고 있는 이야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선민이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 자손에게서 오히려 모세가 하나님 신앙을 배우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보다 미디안 광야의 제사장 집안이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십보라는 처음에 모세가 애굽 사람인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혼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의 몸에 할례가 행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는 장남 게르솜을 낳자 8일만에 할례를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2:22, 창21:4, 25:1-6);

남편은 타국에서 객이 되고 자신의 서글픈 신세 한탄만을 하면서 장남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장남의 할례식에 참석도 아니하고서 멀리 목축현장으로 떠나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모세가 장남 게르솜 할례에 참여를 하였더라면 차남 엘리에셀 할례에도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18:4). 그러나 그는 전혀 할례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애굽인들의 나라에서 탈출시키려고 길을 떠나고 있는 모세가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디로,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장면을 보시고서는 기가 막혔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세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즉각 둘째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치명상을 가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가 하나님의 의도를 재빨리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남편이 너무 애굽 행을 서두르고 있기에 그만 갓난 둘째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할례를 행했습니다(4:25a).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두려운 하나님의 현신이 모세를 놓아주고서 사라지고 있습니다(4:26a).

마음에 여유가 생긴 십보라가 남편 모세에게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남편’(bridegroom of blood)이로다”(4:25b). 그때에 십보라가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라고 설명이 뒤따르고 있습니다(4:26b). 따라서 남편이라는 호칭에는 가지 의미가 담기게 됩니다;

(1)   첫째, ‘바보 같은 남편’(a stupid husband)이라는 비난의 뜻이 내포되고 있습니다. 함족인 애굽 사람의 압제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 위하여 모세가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민족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기에 출애굽의 역사가 필요한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무엇보다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차이는 하나님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당장 육체적으로는 할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17:14).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얼마나 십보라가 보기에도 한심합니까? 그래서 참지 못하고 따갑게 쏘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피를 중시하는 남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피에 생명력이 있으며 피로써 용서함을 얻을 있다 말씀하고 계십니다(9:4-5, 17:11). 그래서 아담부부의 아들인 아벨 피의 제사를 드린 바가 있으며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4:4).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전통을 쫓아서 제물의 피로써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5:9-10).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모세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에 대하여 구절풀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의 묵상 가운데 얻은 귀중한 깨달음과 교훈을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24. 모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4:24);

(1)  모세는 40세에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맏사위가 되어 양을 돌보면서 40년을 지내게 됩니다(2:15, 21-22, 3:1, 7:23, 30).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 호렙산에서 불꽃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3:1-5, 7:7). 모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수배하고 있던 애굽의 바로 투트모세3세가 4년 전에 사망하고 지금은 모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젊은 바로가 애굽제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4:19). 그리고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의 능력을 힘입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큰 사명을 부여 받게 됩니다(3:6-4:20);

(2)  지팡이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여호와의 능력을 얻게 된 모세는 용기 백배하여 애굽으로 떠나고 있습니다(4:20). 만약 애굽제국의 황제인 바로가 모세가 전하고 있는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때에는 여호와의 장자로 선택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나라인 애굽제국의 장자를 모조리 죽여버리는 징벌을 내릴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여호와의 약속을 모세가 기억하고 있습니다(4:21-23).  

(3)  그것은 여호와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반면에 이방인인 애굽 사람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재앙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는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함께하고 있는데 모세의 경우에는 어째서 그와 다른 것일까요? 그 이유가 곧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현신하셔서 다짜고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4:24).

(4)  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쁘게 길을 가지만 저녁이 되면 숙소에서 쉬게 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낮과 밤을 창설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1:4-5). 또 하나는,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창세기 제2장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창조주 여호와와 함께 교제하는 안식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2:1-3).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도자로 세운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와 같은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웠더니 그 하는 일이 여호와와 교제하는 시간이 없이 바쁜 일과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강력한 방법으로 모세를 혼내시고자 하십니다(24).

둘째로, “25. 십보라돌 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4:25);

(1)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짜고짜 남편 모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모세의 아내인 미디안 여성 십보라가 얼른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집안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의식을 치루고 있습니다. 십보라가 모세와의 사이에 낳은 첫아들 게르솜에 대해서는 친정 아버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도움으로 할례의식을 베풀었습니다.

(2)  그런데 둘째아들 엘리에셀을 품 안에 안고서 애굽으로 가고 있는데 아직 그에게 할례의식을 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빨리 애굽으로 가서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로부터 얻은 신위적인 능력으로 구출하여 내야 한다고 남편 모세가 무척 서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자면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와 비교할 때 모세의 공부가 부족합니다. 저녁시간에도 여호와와 교제하며 그 말씀을 듣는 배움의 시간이 없습니다. 할례의 중요성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보라는 남편의 신앙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녀가 너무나 급하여 당장 남편을 살리고자 여호와 앞에서 무딘 돌 칼로 둘째 아들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 포피를 베어서 남편의 발치에 두면서 남편 모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여호와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엉뚱하게 실천하다가 피를 보게 됩니다. 그러한 남편이 되지 마세요. 이 할례의식을 시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4:25의역);

(4)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아들 게르솜의 나이와 둘째아들 엘리에셀의 나이차이가 심한 것입니다. 40년 가까운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아내 십보라는 언제 둘째아들을 낳을 것일까요? 그것은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노년에 낳은 사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18:10-14, 21:1-7). 그러므로 십보라의 둘째아들 엘리에셀은 특별한 교훈을 베풀고자 이 세상에 신위적으로 태어난 아들로 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훗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아들 또는 노인부부에게서 태어나는 세례 요한과 같은 경우입니다(삼하11:4-5, 12:14, 1:7, 13-20, 36).

셋째로, “26. 여호와께서 그(모세)를 놓아 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4:26);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현신한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그 자리를 떠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 장면에서 모세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이 적어도 다음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자는 반드시 여호와와 교제하면서 그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구원의 일이 바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먼저입니다;

(2)  또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의지하여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파수하고 있는 선민임을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모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민감한 자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이방인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여호와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있느냐 하는 하나님 경외의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 경외의 방법이 벌써 여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할례보다는 모세의 깨달음 그대로 마음에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10:16, 30:6);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의인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에서 모세는 자신보다 여호와의 율법인 할례의식의 중요성을 더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 자신의 아내이며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외자라고 칭찬하시는 모리아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22:12). 그러므로 인위적인 선민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이분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본질적으로 중요한 구별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삼상2:30).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이방인의 땅에서 한평생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간 아브라함을 우리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4:16). 그리고 모세 역시 육체의 할례보다는 마음에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16, 30:6).

아무쪼록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민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영생구원을 소망하면서 한평생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