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고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3. 14:57

제목;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고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가?”(11:17-19)

설교일; 주후 202349일 부활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3일 월요일 작성)

 

오늘은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스승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사도와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다시 주님을 영접하고 그때부터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및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죽으심 및 부활 승천사건을 설명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초대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시작의 모습 가운데 저는 당시 유대교인 선민들이 과연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점을 조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생각의 뿌리에 창세기 제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옛날 바벨탑을 건축하던 세상지배자들의 생각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으로 선택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들 세상지배자나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 지 우선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전 2,357년경 고대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지역을 다스리는 강력한 제국이 시날 평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11:1-3). 그들은 위대한 제국의 영광을 모든 족속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을 그 도시의 중심에 건축하고 있습니다(11:4). 그런데 고대시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그 일을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모세가 창세기 제11장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11:6-9). 간략하게 설명을 해봅니다;

(1)  세상의 언어가 하나가 되고 마치 하나의 족속처럼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에 큰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족속의 생각과 문화가 급격하게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상 아래 단결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들은 위대한 인간의 문명과 힘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이 세상에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제11장에서는 상징적으로 신도시의 중앙에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2)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창조주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인위적으로 인본적인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를 좋지 아니하게 보십니다. 그것은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영적이며 지적인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종이 주인이 되어 이 세상에 군림하고자 하는 이른바 패역(悖逆,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패륜이며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주전 24세기에 바벨제국이 붕괴가 된 것처럼 인위적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인류의 노력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허망함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자칭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여겨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다음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을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대왕의 자손인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제국과 같은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여 시온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치실 것이다. 그와 같은 신위적(神威的)인 능력을 가지신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신다는 사실을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히브리경전에 벌써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큰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유대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죽은 자를 3사람이나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 옛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가 한번씩 죽은 자를 살려낸 기록이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나사렛 예수가 선보이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 훨씬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나사렛 예수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유대인들은 예수님만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가 즉시 해결이 될 것이며 그 놀라운 신적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능히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시온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점은 나사렛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스승님을 보고서 이제는 외세를 물리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섣불리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단결된 힘과 지혜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이기심과 세속주의사상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광야에서 40년간 그들을 보호하면서 훈련하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신위적인 능력으로 광야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자 그만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기적인 선민사상과 세속적인 형통의 복만을 추구하고 맙니다;

 여호와께서 선택하여 율법교육을 철저하게 시킨 선민들도 그러하므로 창조주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제멋대로 이기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주전 10세기를 전후하여 다윗대왕이 중근동의 패권국인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러나 그의 제국은 아들 솔로몬대왕의 시대를 지나자 손자 르호보암이 즉위한 다음해에 그만 남북으로 분열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선민의 제국이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종으로 삼거나 속국으로 삼아 착취하는 세상제국의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제국이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을 온세상에 보여준다고 가정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렇다고 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그 점이 벌써 창세기 제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히브리서저자가 본문에서 깊이 있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저자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히브리서저자는 무엇보다도 영생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아브라함처럼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지 그 점을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11:17-19). 그는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한평생 하나님신앙인으로 살아갔지만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습니다(11:13).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한마디로,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한결같이 이 땅 위에 구속자 그리스도가 오는 것을 그토록 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선민들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욥과 같은 동방의 하나님 경외자도 구속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를 다음과 같이 앙망하고 있습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많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19:25-27);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가 되고 또한 어떠한 약속들이 더 나타나게 된다는 것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점에 대하여 많은 묵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그의 깨달음의 일부를 본문에 수록하고 있습니다(11:17-19). 이제부터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1:17);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구해보아야 본문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시험일까요? 둘째,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경우 이미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내용 곧 미래의 별과 같이 많은 이삭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셋째, 결국 아브라함은 어떠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서 약속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하는 것일까요? 넷째, 아브라함이 이미 얻고 있는 약속은 무엇이며 장차 얻어야 하는 약속은 무엇일까요?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무엇에 대한 시험일까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22:1-3);

1)    고대사회에서 아들을 번제로 수호신에게 바치는 인신제사는 자신의 왕국이 패전으로 멸망을 당하게 되는 위기 가운데 국왕이 행하는 마지막 구국의 수단입니다(왕하3:26-27). 또한 이방인들에게서 간혹 볼 수 있는 인신제사(人身祭事)는 풍년을 기원하는 경우에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지역 원주민들이 농사 신 바알에게 풍년을 희구하면서 어린 아기를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2)    그러한 인신제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들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면서 그 종류를 말씀하십니다(1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신제사를 훗날 다윗왕조 유대왕국에서 므낫세 왕이 자행하고 있습니다(왕하21:6). 그 때문에 격노하신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왕국을 반드시 멸망시켜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왕하21:10-13). 그렇게 인신제사를 싫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3)    그 해답의 실마리를 같은 창세기 아브라함의 기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33.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21:33). 아브라함이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 그 영혼이 돌아가게 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으로 말미암아 많은 후손들이 별과 같이 번성하게 되는 것을 원할까요?(15:5, 17:6-8, 19) 아니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을 원할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알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2:1-2).

(2)  그 시험은 하나님의 약속과 어떻게 상충이 되고 있나요? 세상의 논리로 따져보게 되면 여호와의 명령은 애초의 약속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죽여서 여호와께 번제의 제물로 바쳐버리게 되면 누가 다시 약속의 아들이 되고 자손의 번성을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일까요? 이삭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생산한 유일한 독자입니다(21:1-7). 그러므로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고 나면 이 땅에서 성취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그러면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하는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사이의 상충관계를 아브라함이 벌써 알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를 믿느냐? 아니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믿느냐? 둘 가운데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그는 후자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 땅에서 오랜 세월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오면서 아브라함이 터득하고 있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2)    믿음이란 창조주 여호와를 믿는 것이지 결코 세상의 논리나 자신이 처하고 있는 환경을 절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의 탄생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나 자신과 사라의 늙은 몸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서 약속의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7:17, 18:11-12). 오로지 이삭의 탄생은 창조주의 능력이며 기적일 뿐입니다.

3)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들 부부의 아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만들어 주신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진짜 아버지가 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돌려 받고자 하시는데 아브라함 부부가 그것을 거절한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벌써 얻고 있는 약속은 무엇이며 장차 얻어야만 하는 약속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그들의 생을 마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11:13).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벌써 약속들을 받은 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11:17). 그렇다면 어떠한 약속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    하나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벌써 얻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를 들면, 예언의 말씀을 먼저 주시고 그것이 실현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신 것(17:15-19, 21:1-7), 야곱에게 약속대로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신 것(28:13-22, 35:6-15, 27) 등이 그러합니다.

2)    또 하나는 살아 생전에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것 또는 짐작만 하고 있을 뿐 확실한 약속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속자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히브리정경에 실려 있는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살아 생전에 보지 못한 것이 구원주 그리스도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육신이 묻힌 그곳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부활과 영생을 위하여 찾아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47:29-31, 19:25-27, 5:24-29, 8:56, 8:19);

   

둘째로,18.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11:18); 아브라함은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삼아 튼튼한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있습니다(16:2, 15-16). 이스마엘이 13세가 되자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합니다(17:18).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대를 하십니다. 믿음의 여인 사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17:19).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많은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앞으로 자손의 번성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 놀라운 비밀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 구절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셋째로,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9);

(1)  히브리정경에 의하면 실제로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경우가 2번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한번, 선지자 엘리사가 한번 그러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선지자 엘리야는 조국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3년의 가뭄이 들자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북상하여 시돈에 속하는 사르밧 마을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왕상17:8-9).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사는 가난한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 생겨나는 이적이 발생함으로써 과부의 집에서 흉년을 무사히 지내게 됩니다(왕상17:14-16). 그런데 도중에 그 집의 아들이 병사를 하게 됩니다(왕상17:17). 선지자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를 하자 그 아들이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입니다(왕상17:19-24).

2)    선지자 엘리사는 늙은 수넴 성의 여인과 그 남편에게 신세를 지게 됩니다(왕하4:8-10). 따라서 그들 부부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합니다(왕하4:16-17).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다가 그만 머리가 아파서 죽고 맙니다(왕하4:19-20). 그러자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나귀에 태워서 갈멜 산에 기거하고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왕하4:24-25).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서 엘리사는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침내 그 아이가 죽음에서 되살아 나고 있습니다(왕하4:34-37).

(2)  그런데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적을 3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째, 나인 성 과부가 죽은 아들의 장례행렬을 따라가고 있습니다(7:11-12). 아들이 죽었으므로 그 과부는 생계가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죽은 아들을 되살려 내십니다(7:13-17).

2)    둘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중병으로 죽을 고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급히 찾아와서 자기 딸의 병을 살펴 달라고 간청합니다(8:41-42). 많은 병자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예수님의 발걸음이 지체가 되고 있는 도중에 그만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8: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을 방문하십니다(8:50-51). 그리고 방문을 닫고 은밀하게 죽은 소녀를 되살려 내십니다(8:52-56).

3)    셋째, 베다니 나사로가 급병으로 죽게 됩니다(11:3, 14). 예수님께서 그 집을 찾아갔을 때에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간지 나흘이 되는 때입니다(11:39). 나사로의 바로 밑의 누이인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좀 일찍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셨더라면 그의 병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보이셨겠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11:21-22). 그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찾아가십니다(11:38-39).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되살려 불러내십니다(11:42-44);

(3) 지금까지 살펴본 5번의 기적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죽은 자를 되살려낸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둘째, 되살아난 그들이 모두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다시 죽고 맙니다. 셋째, 5번의 기적은 모두 아브라함의 시대가 아니라 그 훨씬 후 시대의 사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더라도 죽음에서 그를 다시 되살려 내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11:19a). 그 이유는 약속의 아들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손의 번성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17:4-8, 19, 21)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반드시 이삭을 되살려 내실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부활의 믿음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다음 3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1)    첫째,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를 수록하고 있습니다(15:11-32). 그 가운데 본문,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9b)고 하는 대목과 유사한 구절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24.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차남이 부친의 재산을 일부 사전에 상속을 받아서 대처(大處, 큰 지역)로 나가서 제 마음껏 살게 됩니다. 그는 재산을 탕진한 후 생존의 위기에 빠져서 비로서 후회를 하게 됩니다.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일꾼의 하나로 살더라도 좋겠다고 생각하고서 돌아옵니다. 그를 다시 아들로 맞아 들이시면서 하신 부친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아들이 다시 영생의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리아 산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특징이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목숨에 연연한 한시적인 삶보다는 영생의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서 영원을 호흡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믿음입니다”;

2)    둘째, 그와 같은 의미에서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오셔서 믿음의 선진들을 죽음의 잠에서 깨워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5:27-28). 그것이 영생의 부활입니다(5:29).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영생의 부활을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과 무덤 속 부활로 역사 가운데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신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부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향년을 맞이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몸을 입고서 부활하여 승천을 하시기 때문입니다(24:6, 50-51). 그와 같은 영생의 구원을 희구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때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 모리아 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무덤속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성도들이 모두 부활하여 주님의 인도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양을 그 품에 안으시고 안전한 우리에 들여보내시는 선한 목자와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헬라어로는 ν Χριστῷ, 영어로는 in Christ)라는 표현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과 선민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순한 양처럼)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성도들의 심령속에 건설되어 있는 성령님의 성전, 고전6:19)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도를 죽음의 잠에서 깨워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3) 셋째,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급히 번제를 실행하려는 아브라함을 말리고 계십니다. 그 대신에 인신제사를 결코 원하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모리아산에서 직접 제물로 사용할 숫양을 준비하여 주십니다(22:13). 그것이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22:14). 여호와 이레의 은혜 덕분에 이삭이 참된 여호와신앙인으로서 남은 인생을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영생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플러스 섬’(Plus Sum)적인 남은 삶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의 실천입니다(28:18-20). 요컨대,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는 이 땅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 얻으신 부활 승천과 천국잔치의 영광에 참여하라고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인 것입니다(22:28-30).

결론적으로, 이 땅에서 자손의 번성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제각각 유한한 인생들을 살다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3:20-21). 그와 같은 이치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방 땅 브엘세바에서 영생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절실하게 부르고 있습니다(21:33).

그리고 이왕 많은 후손을 주신다고 하시면 그들이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신실하게 살아가 영생의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천성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소망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달라고 하시니 이삭에게 영생의 부활을 주실 줄 믿고서 바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을 읽으시면서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