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46강(마8:5-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3. 18:48

마태복음 강해 제46(8:5-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23()

 

가버나움에서 만난 이방인 백부장의 정체와 그의 믿음의 특징(8:5-13)

 

(, mountain)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큰 도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고 있습니다(8:1, 5).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호안(湖岸, lakeside)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왕궁이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를 가르치신 그 산도 갈릴리 지역 서쪽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도시로 들어오자마자 한 사람의 백부장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자신의 부하의 중풍병을 치유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8:5-6). 그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東西)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0-12).

그렇다면 그 백부장은 헤롯 왕가를 보필하고 있는 같은 민족인 이두매 족속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헤롯 왕가에 유대 전역의 통치권을 위임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군장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입니다. 그 옛날 지방 주둔군의 규모로 보면 상당한 지위의 고급장교입니다. 오늘 날에도 만 명 정도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한 사람의 사단장이 후방에 있어서는 큰 ’(, province)를 군사적으로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두매 족속일 가능성을 한번 살펴봅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에돔 족속이 유대 땅 레위 지파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하여 정복을 당했을 때에 그들 가운데 일부가 유대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소위 이두매사람들입니다. 물론 헤롯 왕가는 이두매 출신입니다. 둘째, 그 백부장이 이두매 족속이라고 한다면 이미 유대교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자기 병영(兵營)이나 집으로 초청하여 안수를 하여 병을 낫게 해주는 절차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절차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두매 족속이 아니라 로마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군대가 왜 갈릴리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수도에 주둔을 하고 있을까요? 차제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이유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유대 땅 지배의 방법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대 땅이 제국의 변방에 속하고 있으므로 로마제국 중앙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큰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로마 중앙의 실력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가문이나 왕가가 있다면 위임통치를 하는 것이 경제적이며 효과적입니다. 그렇게 선택이 되고 있는 가문이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스 집안입니다. 그 집안은 서세동점하고 있는 강한 로마의 군사력을 잘 알고서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충성을 합니다. 그 덕택에 가장(家長)인 안티파스는 주전 47년경 유대 총독이 됩니다. 그의 아들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지방을 위임 받아 다스리게 됩니다.

10년 후 헤롯은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그때 안토니우스 장군의 신임을 얻어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 출신인 헤롯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헤롯은 시리아총독의 도움으로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 땅으로 들어와서 헤롯왕가를 세우게 됩니다.

헤롯왕은 주전 27년에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 이유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어 실질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교에 뛰어난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리어 가나안 땅 전체를 다스리는 헤롯대왕이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자면, 이두매 족속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본래 에돔 족속입니다. 레위인 왕조 하스모니안에 의하여 정복을 당하자 유대교로 개종을 함으로써 겨우 유대 땅 남쪽에서 살아남은 족속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민족출신인 헤롯 대왕의 통치를 반대합니다. 그러자 헤롯 대왕은 로마군대의 도움을 얻어서 유대 땅을 아예 정복합니다.

그리고 유대 땅을 실력으로 다스리는 헤롯 왕가의 창시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로마의 군대가 헤롯 왕조의 유대 땅 지배를 도우면서 주둔을 하고 있습니다. 주전 4년에 헤롯대왕이 죽자 살아남은 그의 3왕자가 분봉왕이 되어 가나안 땅을 나누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왕궁 가까이에 주둔을 하고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8:5).

그렇다면 헤롯 왕가에 유대 땅과 그 주변지역 전체의 통치권을 위임하고 있는 로마의 황제는 왜 그 가까이에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로마제국의 통치의 방법입니다. 변방지역일수록 이중삼중으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취할 수 있는 권력의 구조를 만들어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check and balance정책입니다. 서로 충성경쟁을 시켜야만 상호 견제하면서 앞다투어 상대방에 대한 최신정보가 올라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서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의 움직임이 있는지 탐지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 제도가 발전하여 주후 6년경에는 예루살렘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 왕 폭군 헤롯 아켈라오를 파면하여 소환하고 아예 로마총독을 파견하여 주후 41년까지 예루살렘 지역에 군정(軍政)을 실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그러합니다.

가버나움 도시로 들어서자 로마인으로 보이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8:6). 그 백부장의 존재에 대해서 이 글을 적고 있는 세리 마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가버나움 도시에서 세관원으로 로마제국을 위하여 공무를 보았던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백부장의 요청에 대하여 스승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 유심하게 관찰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따르면 선지자는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뒤를 잇고 있는 사람들입니다(18:15).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피지배민족으로 삼고 있는 세상의 제국과 그 이방민족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해방과 영광된 제국을 건설하는데 기여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8:7). 그 말을 그 옆에서 듣고 있었던 사도 마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 좋다고 많은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게 거침없이 칭찬까지 하고 있습니다(8:10).

그 정도만이 아닙니다. 이방인보다도 믿음이 신통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은 모두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동족인 선민에게 대하여 악담까지 하고 있습니다(8:12). 그 엄청난 충격은 곧 스승 예수님이 진실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이 맞는지 그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이방인과 죄인들의 친구인지는 몰라도 선민 유대인을 위하여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여줄 인물은 아니라는 여론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9:10-11). 그와 같이 본인에게 매우 불리하게 조성이 되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의 의혹과 불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와 같은 선민답지 아니한 행동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은 온 세상을 구원하라는 것이지 선민 유대인만을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3:16).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 선민 따로, 이방인 따로, 그렇게 철저하게 차별하고 구별을 하면서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민족 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별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첫 번째 유월절 사건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애굽인들이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피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12:5-13). 그들은 단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뿌려져 있는 대문 안 그 집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장자의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수 많은 잡족(雜族, multi-ethnic)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8).

둘째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 특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부하가 중풍으로 누워있는 숙소에 방문을 하는 것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얼씨구나 좋아할 일인데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상한 반응의 이유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8-9). 한 마디로, 그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이 말씀 한 마디로 먼 거리의 중풍병자에게 나음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그와 같은 놀라운 믿음을 얻게 된 것일까요? 그 선례가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같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헤롯 분봉 왕의 신하가 희귀한 소식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하는 멀리 가나에 가서 치유능력이 탁월한 선지자 예수님을 만나서 가버나움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이 고열로 생명이 위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거리 가나에서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아들이 나았다고 예언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가버나움 집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그 신하는 종들을 만나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4:46-53a). 그 신하는 유대인들이 별로 환영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두매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차별하지를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체험적으로 알게 된 그 신하의 집안은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어 준 유일한 구원주라고 믿게 되었습니다(4:53b).

그와 똑 같은 신앙의 모습을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는 동일한 상급이 임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8:13a). 그 말씀을 따라 창조주의 능력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중풍병자에게 치유의 능력으로 임하고 있습니다(8:13b).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그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선민 유대인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창조주를 창조주로 제대로 대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이 없이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