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42강(마7:7-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 01:14

마태복음 강해 제42(7:7-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8()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문을 두드리라(7:7-12)

 

예수님이 산상수훈 가운데 제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세 가지의 동사로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문을 두드리라”(ask, search, and knock, 7:7)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을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라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 답을 해보자면, “하나님을 구하며 신앙심을 찾으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그때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바깥세상으로 쫓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바깥세상에 살게 된 사람들이 반드시 그곳에서 얻어야만 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처럼 고생 끝에 발견한 아버지 집의 가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이 회복이 되며 창조주와 함께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15:11-32). 그 내용은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한 가운데 살았던 아들이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집을 떠나서 살다가 다시 회개를 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 대신에 물질인 재산만 있으면 충분히 바깥세상에서 한평생 제멋대로 잘 살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받아낸 그 재물은 바깥세상에서 모두 탕진을 하고 말았습니다. 살기다툼의 현장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깨닫게 됩니다. 탕자는 그때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참회를 하면서 함께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 하나님이 따뜻하게 맞이하고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해주십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을 탕자의 비유로 풀이하여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가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2-24).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품게 된 사람이 그 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죄 가운데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지옥 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심판을 받게 되는 사탄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말을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어 보내어 그 죄를 청산하는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실락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구해야만 되는 것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속죄의 길을 마련하시고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시행을 하고 계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게 심판 가운데 구원을 베풀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를 간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을 영위하자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살 때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냥 남들처럼 그렇게 편리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구하고 찾아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초대교회 시대에는 생활공동체인 신앙공동체의 삶으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과 수녀원과 같은 삶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주의 현대사회에 살면서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이 미리 정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9-1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라도 먹이고 입히십니다.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 응답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6:11-13).

셋째로, 그와 같은 성도의 삶이 필요한 이유는 전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도의 방법론을 예수님은 소위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20). 함부로 남의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고 강제로 침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자유의지와 지성 및 감성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존중해주어야만 합니다. 마음을 다치지 아니하도록 조용히 마음의 문을 노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해야 합니다. 그 모범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8),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끝으로, 신앙생활의 황금률이 다음과 같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성도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심상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선지자라는 세 가지 단어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는 위에서 말한 내용을 전제로 하여 다음 말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전제하고 있는 말씀은 좋으신 아버지께서 성도가 요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5:9-11).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 그와 같은 후한 기도의 응답이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 어떠한 경우가 바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경우”(5:12)입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의 비유를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어리를 내게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11:5-9).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비록 귀찮은 요구라고 하더라도 간절히 간구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라는 용어를 가지고 구약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유대인들은 마음의 중심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행위에 치중하여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외치는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본뜻과 선지자들의 선포의 내용을 유대인 사회에 복음으로 다시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바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7:12)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받기만을 원했으며 또한 받은 것을 자기들의 필요에만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받은 것을 가지고 남에게 베풀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신령한 것을 공급해주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3)  또 하나 하나님이 나의 선지자’(20:7)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축복(12:1-3)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12:2). 세상의 온갖 족속이 그를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는 하나님의 복을 맛보고 있기 때문입니다(12:3b).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잘 대접을 하게 되면 그 복이 그 땅에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못살게 굴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 대신에 저주를 하시겠다는 언약이(12:3a) 뒤따르고 있습니다.

(4)  요컨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선지자이며 복의 통로라고 부르시듯이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가난한 레위인과 같은 기업이 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작은 사람 곧 소자하나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을 하게 되면 곧 주님을 대접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40-42, 25:40). 차제에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를 선지자로 대접하는 일도 포함이 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선지자로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복이 그 집과 그 동네에 흘러 들어갈 것이고 오히려 배척하게 되면 반대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하는 자세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