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9강(마6:24-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31. 04:53

마태복음 강해 제39(6:24-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5()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네 가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6:24-30, 12:30, 20:3-11)

 

성경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면 어떻게 정리를 할 수가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창세기 제1장 제1절과 요한복음 제3장 제16절 말씀으로 요약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제5장에서 제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그 기쁜 소식을 팔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5:1-12). 그리고 팔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6:5-13). 나아가서 마귀와 세상의 악한 영들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6:14-7:27). 그것이 이른 바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내용이 정확하게 마가복음 제12장 제30절과 제31절에 실려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30),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1). 마태복음 제22장 제37절에서 제40절 사이에 동일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마가복음의 글을 인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12:30’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마음, 목숨, , 을 다하여라고 네 가지로 더 잘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네 가지의 단어는 출애굽기 제20장에 실려 있는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초(端初,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는 언뜻 보면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사도 마태의 기록을 주옥같이 하나로 꿸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마음을 다 바쳐서 사랑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은 제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고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고 사람들의 마음의 향방에 대하여 명쾌하게 가르쳐주신 다음에 그 내용을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이나 재물이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끌고 있는 엄청난 것입니다. 화폐가 발행되어 사용된 이후부터 물질이나 재물은 돈의 교환의 가치로 계산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돈에는 사람의 마음이 따라다니고 있다고 쉽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방향성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구태여 그것을 모른 체 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을 무시한 채 마냥 하늘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만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요약인 십계명에서는 그 첫마디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재물을 더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채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사랑하고 재물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우선순위와 주종관계를 알아야만 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당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인생의 목적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임을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6:33a).

(3)  그들에게 세상의 것들인 물질과 재물이 더해지고 있습니다(6:33b). 그것이 세상을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법칙인데 어떻게 그 우선순위를 깨닫지 못하고서 마냥 물질을 하나님으로 알고서 섬기고 사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4)  물질과 재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용이 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수단을 가지고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5)  물질과 재물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더하여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여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 일을 돕도록 하나님께서 종된 것들을 덧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건도 마련해주시고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씩 제공해주십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차근차근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종도 보내어주지를 아니했는데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닌지 때로는 멈추어 서서 점검을 할 필요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6)  끝으로 종을 가지고 주인으로 삼아서는 결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객이 전도’(주인과 손님이 뒤바뀌고 있는 잘못된 현상)되고 있는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쉽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목숨은 육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에는 영혼도 깃들어 있습니다. 육체의 기능이 정지하거나 육신이 소멸되게 되면 목숨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육신을 떠나게 됩니다. 다만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목숨은 더 이상 별개로 존재할 수가 없어서 같이 소멸이 되지만 하나님이 육신에 불어 넣어준 영혼만은 창조주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2:7). 그 점을 솔로몬은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3:20-21)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주고 계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셋째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비록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신의 뜻대로 한번 인생을 살아보라고 배려를 해주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들이 그 점을 모르고서 자신의 뜻을 지지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들려오는 응답은 하나입니다. 너의 뜻을 하나님인 나의 뜻에 맞추기만 하면 그 뜻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약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뜻이 자연계에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이름을 걸고서 생물을 살도록 만들고 계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섭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에게 나의 편이 되어 달라고 간구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자유의지로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조율이 되도록 해달라고 예수님처럼 기도를 해야 합니다(26:39).

끝으로, 성도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노력을 하면 나머지 염려가 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처리를 해주십니다. 좋은 실례를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친척들과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9:1-3, 10:1).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직접 전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친지와 동족의 구원을 맡겨드리고서 전심전력으로 이방지역에서 사도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친지를 엄청나게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증거가 그의 저서인 로마서 마지막 장인 제16장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동역자 가운데 그의 친척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있음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27-30). 힘을 다하여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염려를 모두 아시고 더 훌륭하게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