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7강(마6:14-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9. 22:59

마태복음 강해 제37(6: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3()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6:14-18)

 

기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를 하였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기 위해서는 여전히 몇 가지 성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 점에 관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제부터 제7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두 가지 실천사항(6:14-18)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도가 가장 먼저 실천을 해야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6:14-15). 그 이유는 주기도문으로 다음과 같이 조건부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6:12). 성도가 먼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나의 죄를 부디 용서를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간구가 긍정적인 응답을 얻자면 먼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실천이 선행이 되어야만 합니다. 스스로 구속을 받게 되는 조건부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똑똑한 반론을 제기할 수가 있습니다; “왜 스스로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인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만 기도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그런데 그러한 기도가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먼저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고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할 때에만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방침을 정하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5:19-20, 7:16) 그대로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로써 다시 설명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가 그 60만분의 1에 불과한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주지 아니하고서 채무자에게 끝까지 돈을 받아내겠다고 관청으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18:23-30). 그 때문에 일만 달란트 탕감의 효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18:31-34). 예수님은 그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임금의 조치가 바로 천국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8:23, 35).

(3)  소 결론을 맺어봅니다. 형제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주기도문에 들어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서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한 마디가 새삼스럽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그 말씀의 뜻은 저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라는 주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줄 때에 그 첫머리에서 기도의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먼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잘못 알고서 기도를 사람들 앞에서 한다고 착각을 하게 되면 그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한 마디로, 외식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잘못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좋은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내용이 누가복음 제18장에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기도하고 있는 성전에서(18:10) 그렇게 큰 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의로움을 기도형식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상을 사람들에게서 이미 모두 받았으므로 하늘에서는 상급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계십니다(6:5, 18:14).

외식주의와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는 큰 소리로 많은 사람 앞에서 바리새인처럼 기도하는데 그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없을 지라도 이제는 비디오를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와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점을 경고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도 마태의 글에 다음과 같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