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5강(마6: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8. 23:03

마태복음 강해 제35(6: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1()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의로움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의로움의 차이(6:1-6)

 

유대교의 총본산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 성전은 역사적으로 두 번 건축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해는 주전 966년경입니다. 솔로몬 대왕 때입니다. 그때에 대한 열왕기상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4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6:1). 솔로몬이 즉위한 해가 주전 971년에서 970년 사이이므로 성전의 기공식이 주전 966년경에 있었다고 추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전 586년경 다윗 왕조의 남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고 맙니다(왕하25:9). 그 모양을 본 딴 작은 성전 곧 4분의 1규모인 소위 스룹바벨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재건이 된 때는 주전 516년경입니다(5:2, 6:14-15). 그래서 유대민족의 바벨론 포로생활의 고난이 70년만에 끝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대하36:21).

그런데 성전은 재건이 되었지만 다윗 왕조의 제사장나라가 재건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대지파 출신 지도자 느헤미야 총독의 시대가 주전 420년경에 끝나고 나자 다시는 유다 지파에서 지도자가 배출되지를 못했습니다. 아울러 느헤미야 총독이 힘을 잃어버리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주도하는 유대교가 급격하게 타락하고 있습니다(13:7, 28-29). 그 점을 강하게 질책했던 말라기 선지자(2:6-14, 3:7-12)의 시대가 지나고 나자 유대 땅에서는 400년 이상 선지자의 자취가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

400년의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을 국내외에서 이끌어온 종교적 지도자들이 레위인들이며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본토인 유대 땅에서는 중앙에 예루살렘 성전, 지방에 회당을 두고서 백성들에게 유대교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제사는 성전에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가 유대교의 최고기관이며 레위인들에 의하여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해외에서는 유대인 교민들이 회당을 만들었는데 레위인들이 랍비가 되어 전통적으로 유대교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레위인들 특히 경전연구에 목숨을 걸었던 바리새인들이 대를 이어서 백성들에게 히브리 경전을 가르치는 등 열심히 종교활동을 해왔는데 왜 수백 년 동안 그들에게 성령님의 감동과 임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왜 그들이 선지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요?그 해답의 실마리가 뜻밖에도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16:7)의 눈에 바리새인들이 들어오지를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바리새인들은 의인들입니다(18:11-12, 10:3). 율법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히브리 경전의 말씀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정반대입니다. 그 마음속에 종교적인 눈속임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1:7, 12). 그러므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를 하고 싶어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본받지를 말고 오히려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행동을 변화시켜나간다면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사람)들 앞에서 너희(예수님의 제자들)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눈을 먼저 의식하고 행동을 바르게 함으로써 큰 상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그가 청년 요셉입니다. 주인 보디발의 아름다운 아내가 잘생긴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은밀한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단호하게 뿌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은밀한 가운데 요셉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환한 눈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9:9).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셋째로, 특히 매스컴과 여론에 바리새인들이 민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활동이나 기도를 할 때에도 꼭 회당이나 길거리 등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골라서 나팔을 불어가면서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6:2a, 5a). 그와 같은 외식과 전시적인 행위는 매스컴에서 크게 다루어지며 백성들의 칭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이미 충분한 상을 받고 말았기에 하늘나라에 적립할 수 있는 크레딧’(credit)이 없는 것입니다(6:2b, 5b).  

끝으로, 예수님의 그 유명한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3-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예수님은 은밀하게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기도한 것과 구제활동을 한 것만 갚아주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상급을 바란다면 티가 나게 기도를 하며 구제활동을 한다는 등 드러나게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그와 같은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너무 떠들지를 말라고 합니다(5:14, 8:56).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 상급이 부활과 승천이며 하나님 존전(尊前, in the holy presence of)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둘째,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는 일이 진지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청중이 적으며 피교육자가 적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복음에 비추어서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경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께서 그 가운데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이후부터는 만사가 하나님의 뜨거운 관심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