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2강(마5:33-3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6. 23:02

마태복음 강해 제32(5:33-3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8()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의 차이를 네 가지로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예수님(5:33-37)

 

사도 마태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의 차이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맹세의 효력에 있어서의 차이(5:33), (2) 천지간 소유권에 있어서의 차이(5:34-35), (3) 시간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의 차이(5:36), (4) 증거능력에 있어서의 차이(5:37) 등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한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헛맹세를 하면서 틀림없이 자신이 그 맹세를 지킬 것이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엄청난 신뢰를 주기 위하여 자신의 맹세에 대한 보증인으로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상대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보증인으로 차용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사도 마태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마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모세오경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30:2),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23:2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맹세에 있어서 보증인이 되시거나 또는 일종의 보증인으로 기속(羈束, 굴레가 씌워지는 것)이 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 사이의 맹세에 신뢰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이 내뱉고 있는 그러한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주시지를 아니하십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성격을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 3:14)라고 모세에게 이미 밝히시고 계십니다.

맹세의 보증인으로서만이 아닙니다.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은 전능하신 창조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그 이름과 능력을 빌리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세상에서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 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경우에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자신이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요구를 수용해야만 하는 종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의 소유주라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힘있는 자의 그와 같은 주장이 혹시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천지만물이 마치 자기의 소유물이기나 한 것처럼 그것을 두고서 맹세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한 영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가 그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마귀나 악한 영들은 천하만국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예수님 앞에서 마치 자신이 천하만국과 그 모든 세상적인 영광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했습니다(4:8-9). 그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며 완벽한 사기행각입니다. 그와 같은 행태를 사람이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시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5:34-35).

셋째로, 사람은 시간의 차원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느끼고 있는 시간의 차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단선적인 것입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그렇게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반대방향으로의 흐름은 일체 허용이 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킬 수도 없으며 그 차원을 뛰어넘을 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죄수와도 같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5:36).

머리털의 색깔이 검은 색에서 흰색으로 바뀐다는 것은 세월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순응하여 사람의 육신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와 같은 자연의 변화를 멈추거나 역진(逆進, 거꾸로 진행)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능력면에서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도 난센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며 시간의 노예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흰 머리카락을 검은 색으로 염색하면서 마치 젊어진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늙어가는 자신의 육신을 적절한 운동과 과학의 힘으로 젊게 만들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만 때로는 그 자기 기만의 도가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육체적 외형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복음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4:23-24). 그리하면 성도의 몸은 비록 감옥에 갇히어 있다고 하더라도 성도의 영성은 그 감옥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결코 성도의 영성을 가두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8:39, 1:12-14).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도록 했습니다(2:7). 그러므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가운데 유일하게 시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성입니다. 사람이 그 영으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모든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육체적인 제약을 벗고 영적인 능력을 키워나가야만 할 것입니다(8:8-17). 성도의 영적인 능력이 믿음의 성숙의 정도와 비례하여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법정에서 진술을 할 때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 아니요로 간단하게 답변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질문자가 이미 자신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조사를 다해놓은 자료와 진술서를 가지고서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간략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성도의 모든 신상자료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구차하게 변명을 하는 것은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저 , 아니요로 답하면 충분합니다.

결론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고서 본인의 시인절차만을 거치고 있는데 그 앞에서 다시 핑계와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그 옛날 카인의 경우처럼(4:9) 완전범죄를 꿈꾸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속여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