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3강(마5:38-4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8. 00:17

마태복음 강해 제33(5:38-4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9()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이라는 율법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보응의 악순환과 증오의 확대를 어떻게 끝장낼 것인가? 하나님께서 마련하고 계시는 대속과 구원의 시나리오가 엄청난 포용과 사랑의 말씀 가운데 엿보이기 시작하다(5:38-4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 곧 복음을 가지고 구약에 수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볼 때에 그 말씀의 본래의 뜻 곧 진리성이 잘 드러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 복음이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본래 뜻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과 목숨까지 그 일을 위하여 바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공생애에 나선지 36개월만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과 노선이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장사된 지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을 시키고 있습니다(2:24). 그 반면에, 예수님의 복음이 거짓이며 그를 사이비 메시아라고 정죄를 했던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이 세상에서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대교의 권위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40년 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제1장에서 복음의 진리성과 공의성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리고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 말씀의 본뜻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믿는 자들이 구원과 부활의 새 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7:50-54).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왜 유대교지도자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보다 예수님의 복음적인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판정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행동이 하나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며 진리입니다(4:24). 반면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1:42, 12:1). 그래서 그 마음 속에 진리의 성령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14:17). 둘째,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의 허물과 죄의 대가인 사망을 자신의 몸으로 감당을 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한 속죄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계십니다(2:24).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고전15:22-23).

위와 같은 복음의 시대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 사도 마태가 이제는 깨달은 마음으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본문이 백미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사회가 의지하고 있는 고대의 보복법 원칙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크게 수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율법의 근간이 되고 있는 원칙이 복음에 의해서 수정이 되고 그토록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죄악을 범한 사람을 처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여 죄악을 범하도록 만들고 있는 마귀와 악한 영들을 근본적으로 분리시켜서 처벌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자들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 악한 사람들도 긍휼의 대상이며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진짜 용서해서는 아니 되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 진짜 원수가 바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6:12). 그 악한 영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이제부터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 요체는 한 마디로,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구원하고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는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첫째로, 율법의 기반이 되고 있는 고대 보복법 원칙에 대하여 모세오경이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1:24-25),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24:20), “(조직적인 위증자에 대하여)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19:21).

모세의 율법이 오경을 통하여 전해진 그 이후 1,4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님 당시까지 유대인 사회에서는 보복법 정신이 율법 속에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38).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산상수훈을 통하여 원수에게 보복하지를 말고 오히려 관용과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5:39).  

원수에게 보복을 행하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 말씀의 본뜻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환언하면, 원수에 대한 보복법적인 대응은 그 원수의 생명까지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는 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급은 원수인 사람과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와 악한 영들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진짜 원수인 사탄은 박멸을 하고 원수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가짜 원수인 사람들은 용서를 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선대(善待)를 한다는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행동을 하시고 자신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5:39)라고 하는 대목은 유대교지도자들의 계획적인 예수님 죽이기 작전을 아시면서도 그대로 끌려가셨으며(53:7, 26:52-56) 유대인들의 오해와 배신까지 묵묵히 견디시는 예수님의 훗날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고 있습니다(27:39-44, 6:66-67, 19:14-15). 특히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임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제자로 거두신 것에서 주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13:21-27).

그리고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5:40)라는 언급은 더 리얼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로마의 병정들이 서로 그 옷을 차지하고자 제비를 뽑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22:18)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9:23-24).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도 모두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진짜 원수들인 악한 영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가 없습니다. 음부에까지 내려가셔서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8:2).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셋째로, 구원의 대상자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해와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그들까지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에 순종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이 되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五里)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41-42).

참고로, 꾸고자 하는 자에게 무조건 신용조사도 없이 꾸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기준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는 험한 산길에서 강도를 만나서 가진 재물을 모두 잃어버리고 상해(傷害)를 입어서 생사의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입니다(10:30).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생존의 위기에 처해있는 자를 무조건 도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잘 먹고 살기 위하여 그리고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상대방의 선의를 악 이용하고 있는 경우에 대해서는 달리 대처를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를 염두에 두시고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