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0강(마5:21-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5. 21:56

마태복음 강해 제30(5:21-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6()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복음의 내용, ‘마음에 할례형제사랑’(5:21-26)

 

예수님의 공생애는 36개월에 불과합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사역의 농도는 상상 이상입니다. 과거 어느 선지자도 진 적이 없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극형에 처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소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전 9세기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엘리야와 비교를 해보면 그 점을 뚜렷이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두 번의 기적을 불러 일으킨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기도를 하여 심하게 우상을 섬기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3년 반 동안 가뭄이 들게 했습니다(왕상17:1, 5:17). 그리고 또 기도를 하여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지게 했습니다(왕상18:41, 5:18). 그 정도로 능력이 많았던 선지자 엘리야가 왕후 이세벨의 미움을 받게 되자 체포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하여 남조 유다 왕국으로 정신 없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왕상19:2-3).

가나안 남쪽 브엘세바에서 기진맥진하여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왕상19:3-7). 그리고 호렙 산으로 불러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고 있습니다(왕상19:8-18). 엘리사를 제자로 삼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후임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정도의 간단한 사명입니다(왕상19:15-16). 그 대목을 묵상해보면 엘리야는 자신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 아주 깊이 있게 깨달은 선지자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조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백성이 사라지자 자신도 죽기를 소원하는 정도의 신앙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무리 사명으로 간단한 것만 맡기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를 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제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높은 장대에 매단 것처럼 자신이 그렇게 달려야만 합니다(3:14-15). 그래서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자신의 죽음과 3일만에 이루어지는 부활에 대하여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8:31, 9:31, 10:32-34).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시고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신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제자들과 헤어질 것이기에 예수님은 아무런 미련이나 원망함이 없이 매우 담담하게 제자들의 허물과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사도 마태가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비로소 이해가 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20:13, 5:17)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모든 율법의 요강이 되고 있는 십계명 가운데 제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율법의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고대 보응법적인 성격에 의하여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는 자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 죄를 대신해야만 합니다(21:23). 구약 율법의 시대에 있어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죄만큼 무거운 죄악에 대하여 달리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형제에게 대하여 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비난만 하더라도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어떠한 기준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말씀은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만드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형제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들어 있습니다(1:26-27). 그러므로 형제를 바보라고 비난하고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처벌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훗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화목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사함 받고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에게 욕을 하고 바보라고 불렀으니 자기도 모르게 그 형제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욕한 셈입니다. 그 대가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가 먼저가 아닙니다. 우선 형제에게 화해를 청하고 땅에서 매인 것을 풀고 볼 일입니다(18:18). 그 일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구나 형제가 아직 생존해 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반이라는 한시적인 공생애를 사시고 죽음에서 부활을 하시게 되면 바로 승천을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2:31-33). 예수님께서는 훗날 그곳에서 제자들 모두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14:2-3).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그토록 쉽게 그리고 절실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과 모양이 들어있는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형제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임을 자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25:40). 주님이 그 형제를 구원하여 천국에서 만나보기를 원하고 계시니 그 마음으로 성도들도 형제를 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셋째로,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謝和, 사과와 화해)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獄吏, 옥을 지키는 관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5:25-26). 형제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형제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의 소유물에 대해서도 귀하게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형제에게 분깃으로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로채거나 빌려서 갚지를 아니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이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누어준 것에 대하여 시기하지 말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말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형제의 것을 갚지 않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많이 차지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형제들의 몫으로 배분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양보를 할 수가 있게 될까요? 한 마디로, 그 방법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며칠 안에 자신의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전혀 이야기는 달라지게 됩니다(12:20). 하나님께서 귀히 보고 계시는 형제에 대하여 엔간하면 용서를 해주고 함께 살고자 합니다. 미구(未久, 오래지 않음)에 자신에게 닥칠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긍휼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성도들이 같은 시관(視觀, view of time,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살면서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들의 복음적인 깨달음이며 생활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