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7강(마5:11-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5. 03:13

마태복음 강해 제27(5:11-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3()

 

세상적인 복을 전하는 경우와 예수님의 복을 전하는 경우의 차이(5:11-12)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복된 소식을 여덟 가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이 영 이상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같이 화를 자초하는 것들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살이에 있어서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의 복을 얻겠다고 그렇게 살게 되면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마이너스가 주어지게 됩니다. 요컨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이(16:24) 바로 팔복을 얻겠다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팔복의 내용을 다시 묵상을 해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1)      결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풍요로운 세상 가운데에서도 영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배고픈 삶입니다(5:3).

(2)      마냥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인생이 아니라 병들고 죽고 하는 고통스러운 인생들을 먼저 돌아보고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5:4).

(3)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먼저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온유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5:5).

(4)      세상적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정의가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 그리고 그들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는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5:6).

(5)      상대를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먼저 동정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5:7).

(6)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서 그 마음과 몸을 먼저 깨끗하게 간수를 해야만 합니다(5:8). 다른 사람들이 세속적인 방법으로 살아간다고 하여 자신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삶은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거나 그러한 방법으로 세상적인 복을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여 똑같은 방법으로 맞대응을 해서도 아니 됩니다.

(7)      자신만이 의롭다고 주장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5:9). 그리하면 화평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터무니 없이 정죄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8)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만 합니다(5:10). 피조물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 돌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신실한 청지기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상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천국의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세에서는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서 말하고 있는 팔복의 결론입니다(5:10).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제11절과 제12절에서 다시 한번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에서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중상모략을 당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기자신이 처신을 잘못하여 자초한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 특히 예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팔복과 관련하여 핍박과 박해를 당하는 경우는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 ,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살려고 하다가 당하게 되는 고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함부로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다가 욕을 먹고 고난을 자초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변명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화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는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평안과 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일찍이 선지자들도 사명을 감당했다고 예수님께서 강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2).

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대로 살지를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세상적으로는 형통한 자의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 속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며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불안한 요행과 무당을 의존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대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39-44).

차제에 위의 말씀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곁들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연구하여 영생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방법이 바로 예수님처럼 억울한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2) 만약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영생을 줄 수 있는 통로가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제멋대로 말씀을 왜곡하여 전했다고 한다면 박수갈채를 받으며 세상적인 영광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정직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다음에는 깨달은 말씀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조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17:3-5).

그러한 삶의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교과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인 일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영생의 개념을 조작적으로 정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검토의 과정에서 또 하나 얻을 수 있는 결론이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팔복의 내용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제시가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