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6강(마5:1-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4. 16:28

마태복음 강해 제26(5:1-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2()

 

사도 마태가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내용을 팔복(八福)으로 정리하여 소개하다(5:1-10)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을 그의 복음서 제5, 6, 7장에 연이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따르는 무리들을 따돌리시고 따로 제자들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복음내용의 핵심을 상세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내용을 흔히 산상수훈’(山上垂訓, Jesus’ mountain serm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피하여 제자들만 산으로 별도로 부르시어 자세하게 복음의 내용을 가르쳐주셨다는 사실, 곧 등산(登山)과 하산(下山)의 장면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5:1-2),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8:1).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여덟 가지 복의 내용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복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잘 지키면 무조건 세상적인 복을 풍족하게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인과응보적이고 현세구복적인 복의 개념은 유대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를 보게 되면 당시 고대 동방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의 개념과 보응의 원칙을 팔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게 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을 받게 되면 마음과 몸 그리고 가문과 나라가 모두 부유하며 평안을 누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영혼이 가난함을 느끼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천국에서의 복을 더 이상 거론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복에 관하여 선지자들이 종말과 관련하여 수없이 말했지만 유대인들은 믿지를 아니했습니다. 한 마디로, 현세적인 평안함과 부유함 그리고 형통함을 주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지 그들은 내세의 복을 주는 여호와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이라고 하면 목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구원이라고 하면 영생의 차원이 아니라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구출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사회에서 예수님께서 첫 마디로 복음이란 현세에 안주하지 아니하며 영생을 갈구하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쉽게 정리를 하자면, 풍요로운 물질사회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배고픔’(the spiritual hunger)을 느끼고 있는 자에게 복음이 주어지며 천국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나 위로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불교적인 용어이지만 인생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미래완료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죽음이 이미 예약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늙고 병이 드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나 가까운 친지(親知, 친척과 친구)의 가혹한 운명에 대하여 애통함을 느끼지 아니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생에 대한 위로가 모든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는 현세적인 위로밖에 해줄 수가 없습니다. 내세(來世, after life, 오는 세상 곧 죽음 이후의 세상)는 창조주에게 속한 것이기에 함부로 언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내세를 가지고 위로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효용성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창조주가 계시는 영생의 천국으로 승천하신 바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적인 말씀이라면 참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복음이며 성령님의 증거하심 가운데 성도들에게 영생의 진리로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땅을 자신의 기업으로 얻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는 땅에서 먹을 것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기다툼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땅을 차지하겠다고 경쟁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의 결과 승리를 한 자 곧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온유한 자는 경쟁에서 승리를 하는 강한 자가 아닙니다. 양보와 배려가 많은 자가 온유한 자이므로 경쟁에서 뒤처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역설적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비밀을 창세기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두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블레셋의 옥토 그랄 평야에서 피난생활을 영위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는 곳마다 우물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원주민들이 연고권을 내세워서 힘으로 그 우물을 차지하고 말았습니다(21:25, 26:15, 20-22). 뜨내기 이주민에 불과했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은 계속 양보를 하면서 변경 브엘세바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론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승리입니다. 그들이 블레셋의 땅에서 더 큰 부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20:14, 21:22, 26:12-13, 32-33). 그 비결은 우물물을 양보하며 함께 나누어 사용하기를 원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2:3, 26:4). 그러므로 작은 부자는 살기다툼에서 승리하는 자가 될 수가 있지만 큰 부자는 창조주의 각별하신 보호하심과 축복이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있게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팔복 가운데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라는 것입니다. ‘’()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의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입니다. 세상적인 의를 흔히 정의’(正義, justice)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는 공의’(公義, righteousness)라고 부릅니다. 정의는 법정에서 판가름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세상의 법정에서 판결이 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세상사람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자기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집단의 정의는 곧 다른 집단의 이익을 해치거나 도외시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한 마디로, 정의라고 하는 것은 같은 집단 안에서만 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로섬(zero-sum)적인 사회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사람의 힘으로써는 분명히 불가능합니다. 다만 창조주의 전능하신 능력과 섭리가 함께하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힘의 공급이 주어집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다섯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긍휼’(矜恤, compassion)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은혜긍휼이라는 두 가지의 용어로써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3:19). 하나님의 은혜는 만민에게 골고루 주어집니다. 그것은 공의의 정신에서 비롯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5:45).

그렇지만 세상살이 가운데 뒤처지는 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질병과 장애로 인하여 생활전선에서 소외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도적으로 소유권을 가질 수가 없으며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고 있는 계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민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passion)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소외된 자, 병든 자, 장애자, 그리고 생계와 생명의 위험에 처한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을 입고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11:5). 본문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쉽게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

여섯째로,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천국을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3:3)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게 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바로 거듭난 자라는 뜻이 됩니다. 창세기 제35장의 내용을 보면 소위 세겜 사건을 일으킨 야곱의 집안이 살길을 찾아서 급히 남하를 하고 있습니다(35:1).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벧엘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살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청결하게 하며 의복을 깨끗하게 바꾸어 입고 있습니다(35:2). 그렇다면 거듭난다고 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청결하게 한다는 개념이 꼭 들어가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하는 결심과 행동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를 하시고 그 인생 길에 동행을 해주실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일곱째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라는 것이 일곱 번째의 복입니다. 세상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틀렸다고 말하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 소위 ‘trouble maker’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종교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하나님 말씀의 대원칙이 되고 있는 공의의 법칙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저 남 보기에 율법의 조항을 지켰다고 하여 자신은 의인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공의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죄인을 의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동등하게 생각하면서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덟째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는 것이 팔복의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박해를 받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제일 앞줄에 순교자들이 서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위하여 복음사역을 하게 되면 박해를 받게 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55:8-9). 세상사람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자들을 별로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판이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대상이지 그들이 환영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

결론적으로, 세상사람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는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가장 먼저 부활하여 천국에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고전15:19-24). 그와 같은 표현이 다음과 같은 팔복의 결론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살아간 제자들이 가장 큰 복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되고 있는 천국입성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