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4강(마5:43-4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8. 00:18

마태복음 강해 제34(5:43-4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0()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5:43-48)

 

전통적인 선민들의 해석과 예수님의 복음적인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4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앞부분의 말씀은 전통적인 선민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오경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언뜻 보면, 마가복음 제1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복음과 비슷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그러나 큰 차이가 하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해석은 이웃사랑과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동포라고 하는 선민사회 내에 국한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유대인들의 관념은 “(선민사회 내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동포를 원망하지 아니하지만,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원수로 알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념과 상당히 다릅니다;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웃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같은 동포로 여기고 사랑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그와 같은 차이점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말씀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부터 발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인 야곱 곧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하나님 신앙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방인화되어 버렸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있어서도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조 유다 왕국의 유민들만이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인데 그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전인수격인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해석입니다.

출애굽기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이분법으로 선민만의 구원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제국이며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삼고 있었던 애굽은 열 가지 재앙을 받으며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는 것이 역사의 진행방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믿음의 열조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출애굽을 하며 거룩한 백성으로 영광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19:5-6).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바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2:3, 17:12-16, 66:20).

과연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옳은 것일까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목숨을 걸고서 부르짖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장면이 제자들을 산으로 따로 불러서 복음의 진수를 설명하고 있는 산상수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히 본문 5:43-48’절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사도 마태의 기록(5:44-45)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1:1).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피조된 세상을 보시고서 만족하십니다. 그 표현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4, 10, 12, 18, 21, 25)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1:26-27). 세상을 관리할 수 있도록 영혼을 불어넣은 창조물입니다.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 자연을 보시니 한층 가슴이 뿌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만족하십니다. 그 표현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 좋았더라고 하는 평가는 사람과 천지간 만물이 모두 함께 자리를 잡고 있으니 하나님 눈에 한결 좋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만민과 만물을 모두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모든 피조물이 제 자리를 지키도록 섭리하시면서 하나같이 가슴에 품고서 사랑하고 계시는 모습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righteousness)입니다. 달리 표현을 하자면 만민과 만물은 모두 자신의 자리와 궤도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제 위치에서 함께 조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격상이 됩니다. 공의가 실천이 되고 있는 세상은 심히 좋은 세상입니다(1:31).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차별성과 조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개념의 한 단면을 사도 마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4-45).

 

악의 뿌리를 도려내시는 하나님의 방법(5:46-48, 3:15, 6:4, 8:2)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라”(5:44)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없이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원수를 미워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그들을 쳐부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예수님의 인간론은 한 마디로,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시험에 들어 있는 불쌍한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매일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6:12-13). 사도 바울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르면, 악의 뿌리를 영적인 인간의 환부에서 도려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쫓아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과 성령님을 모셔야만 합니다. 그 작업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먼저 지시고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받게 된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내주(內住)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줌으로써 가능해집니다(8:1-2). 그러므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주로 영접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와 출신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관심과 돌봄의 대상입니다. 이에 따라 먼저 믿은 자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제 몸과 같이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6-48). 여기서 특히 세관원인 세리’(稅吏, tax officer)를 예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글의 저자는 사도 마태임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동포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같이 여기고 있는 이방인들도 같은 동포처럼 여기고 사랑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동포이거나 적국의 백성이거나 모두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피조된 세상에서 만민과 만물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공의의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실천을 하라는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