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6강(마6:7-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8. 23:05

마태복음 강해 제36(6:7-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2()

 

중언부언(重言復言, 했던 말을 또 하는 등 명쾌하지가 못함)과 깨달은 말의 차이, 그 실제의 예로서 제시가 되고 있는 주기도문’(6:7-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사도 마태에 의하여 본문에 일명 주기도문’(6:7-13)으로 수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 수록하고 있는 소위 바리새인과 죄인의 기도’(18:11-14)라고 하겠습니다.

그 두 가지 기록에서 얻을 수 있는 기도의 기본자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많은 말로 꾸며서 기도하지를 말고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서 부디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오늘의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을 내려달라고 정직하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사도 마태는 먼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7-8).

여기에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지 못한 자를 이름하여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므로 이미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칭 이방인이 아니고 선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 가운데에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러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면,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 앞에 보이고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고 예수님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중심과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바리새인들은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는 자들의 기도보다도 못한 변명과 핑계 그리고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18:11-12). 그것은 일종의 중언부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직언(直言,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드디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6:9a) 가장 간략하면서도 정직한 기도의 내용을 5구절로 압축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라고 제일 먼저 기도의 말문을 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1) 기도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주 바깥 하늘’(the heaven, 6:9b)에 거주를 하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sky, 1:7)이 아니라 우주 바깥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고 기록한 그대로 영이신 하나님께서(4:24) 우주를 수면으로 둘러싸고서 그 바깥 하늘에 보좌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5:34).

(2) 창조주 하나님을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에게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6:9c). 그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성도들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송축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 13),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3) 하나님의 이름은 피조물들이 훼손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는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3:14)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든 신들’(man-made gods)에 불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종처럼 부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아니하는 거룩한 곳에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알고서 창조주로 제대로 대접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d)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아버지) 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시간이 지나면 이 땅에서 성취가 되고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제사장나라를 없애시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를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자 계획을 하셨다면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시행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실현이 되고 있는 모습을 사도 요한이 미리 보고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의 나라이며 영생을 누리는 성도들의 나라입니다(7:14, 18, 22, 27, 고전15:24). 그러므로 그 나라가 이 땅에 하루속히 임하도록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라는 기도는 광야생활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에 이슬이 사라지고 나면 지면에 깟씨와 같은 만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루에 일인당 한 오멜 곧 2리터씩 거두어서 양식으로 삼았습니다(16:16). 다음날이 되면 부패가 되고 마는 것이 만나입니다(16:20). 다만, 안식일을 위하여서는 그 전날에 2오멜씩 거두었으며 이틀간 부패가 되지 아니했습니다(16:22-27). 그렇게 매일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매일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일년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면서 자신들의 농사기술과 경험만을 절대시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에서 얻었던 하나님 신앙이 자꾸만 퇴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의 교훈을 되살리라고 여기 주기도문에서 요청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6:11).

넷째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6:12)라는 기도는 땅에서의 화해와 용서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고대사회의 보복법 정신에 비추어볼 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21:23-25).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대신 감당해주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역사적으로 단 한번 이루어진 고귀한 희생입니다. 그 대속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가 비로서 당사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제 믿는 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큰 죄를 대속의 은혜로 탕감을 받았기에 이웃 사이에 존재하는 빚을 자신도 탕감해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아니하고 있기에 이웃의 죄를 용서해줄 이유를 발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그 마음 속에 임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불행이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3)이 기도의 마무리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따라다니고 있는 어려움이 시험입니다. 세상에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젊어서는 진학과 취업을 위한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진급을 위한 시험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똑 같은 시험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 듣는 것, 탐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을 뒤흔들면서 성도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을 당한 결과 이제는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게 되면 시험을 통과하게 되고 유혹에 빠지게 되면 악한 세력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능력과 의지로써는 그 마귀와 악한 영의 유혹을 물리치고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역사적으로 유일한 승리의 장면이 예수님과 마귀와의 한판 승부로 기록이 되고 있을 정도입니다(4:1-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즉시 요청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정당한 요청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부터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에 몇 번이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기 위하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가지고 힘있게 기도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