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38강(마6:19-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9. 23:01

마태복음 강해 제38(6:19-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4(주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그 마음가짐으로서 제시가 되고 있는 것, “오직 너희를 위하여 네 마음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6:19-23)

 

평생을 땅에서 보물을 캐내겠다고 하는 욕심으로 세상일에만 몰두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결과는 한 마디로, 허무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지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러한지 예수님께서 차근차근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째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게 되면 좀이 먹어 치우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6:19a). 좀이 먹어 치우는 것은 종이와 옷가지 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 사회에서 옷감이 귀했습니다. 그리고 책과 종이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너무 아끼다가 보면 좀이 먹게 되어 못쓰게 됩니다. 따라서 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보람 있게 사용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좀이 먹지를 않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6:20a).

둘째로, 그렇다면 좀이 먹지 아니하도록 품목을 바꾸어서 돈을 모아두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 당시는 로마제국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동전에는 로마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22:19-21). 그것을 많이 모아두게 되면 녹이 생긴다고 예수님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6:19b).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마치 동록(銅綠)처럼 자녀들이 그 돈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말고 그 돈을 가지고 영혼을 구하는 하나님 일에 사용을 하라는 교훈입니다(6:20b).

셋째로, 좀이 쓸지 않고 동록이 나지 아니하는 고가의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황금과 보석과 같은 귀금속입니다. 그리고 문전옥답(門前沃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재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많이 얻기 위하여 평생을 투자합니다. 만석꾼이 되게 되면 평생을 누리고 살다가 전답(田畓)을 자식들에게 대물림을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를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도둑이 들기 때문입니다(6:19c). 도둑이 없는 곳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것을 사용할 줄을 알라고 하는 교훈입니다(6:20c).

넷째로, 재산을 일구기 위하여 평생을 전심전력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얻기 위하여 평생을 투쟁적인 삶으로 일관합니다. 마침내 재벌이 되고 대권을 쥔 권력자가 됩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20세기 후반에 일본의 수상이 된 한 인물에게 한 젊은이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일본의 수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그 질문에 현직 일본 수상은 매우 진지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나처럼 일본의 수상이 되겠다고 먼저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한 가지만이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마음 속으로 확정을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바치십시오, 그러면 나처럼 일본의 수상이 되어 있는 당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일본의 수상이 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평생을 열심히 노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다 바쳐 주님처럼 살아갈 것입니까?” 그와 같은 의미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다섯째로, 세상의 영화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비교하면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의 영화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화는 당장 누릴 수 있는 현실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평생 가운데 누릴 수가 없는 미래적인 것입니다. 어느 것이 당장 지금 이 땅에서 더 필요한 것일까요? 당연히 세상의 영화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세상의 논리에 맞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소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세상논리에 맞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애처 사라 역시 불임여성입니다(11:30). 나이도 부부가 노년입니다. 아브라함이 85, 아내 사라가 75세였습니다(12:4, 16:3). 현실적으로 100%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예언을 하시는 분이 바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을 신뢰할 것입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며 만물을 만드신 그 분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피조된 세상의 자연적인 이치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영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사람의 밝은 눈과 마음의 눈 그리고 이성적인 안목이 모두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6:22-23).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세상에 현혹이 된 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 눈이기 때문입니다(18:1-5).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이 창세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15:6-7).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믿고서 그것을 먼저 구했기에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넉넉하게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한 창세기의 역사를 묵상해보면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결론이 우리의 눈을 밝혀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것은 평생의 수고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맥락의 뜻을 전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