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41강(마7: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 01:12

마태복음 강해 제41(7: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7()

 

비판을 재판장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맡기라(7:1-4)

 

본문에서 비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judgement’를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용어는 본래 사법적인 것입니다. 원고와 피고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 가서 따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법정에 가기 전에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미리 판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서 상대방에게 원초적인 하자가 있다고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맙니다.

사회생활의 여러 부문에 있어서 그러한 속단(速斷, 빠른 단정)과 정죄(定罪, saying guilty)라고 하는 행위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명예훼손에 대한 사법적용의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예나 지금이나 더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노선이 조금 틀린다고 생각이 되면 거침없이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정죄를 하고 단정을 하는데 있어서 신중함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상대방이 처음부터 하자가 있고 이단성향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여 그것이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우선 역사적으로 간단한 실례를 살펴보면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9세기부터 13세기 사이 중세의 유럽에서 스콜라철학이 한때 대단했습니다. 당시 철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이 상당히 발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형식적인 논리가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단을 뒤집어 놓은 것이 정통이라는 단순논리까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한 마디로, 서로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이 정통적인 신앙에 입각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언뜻 보면, 간단명료하고 명쾌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재판장이시며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7:1-4).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낸 성숙한 신앙인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는 방법(7:5-6)

 

형제의 눈 속에 들어 있는 티는 작은 허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엄청난 죄성(罪性)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할 수가 있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자신이 남을 비판할 자격조차 없는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바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 가운데 정직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마치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다시 만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 사울은 그때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지신 십자가가 사울 자신을 위한 것임을 홀연히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1-3). 동족인 유대교인들이 아직도 그 옛날 랍비 시절의 바울 자신처럼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 자신들이 옳다고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죄성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족들 유대인들도 하루 속히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를 하고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며 이방인 사도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1:1, 고전1:1-3). 그러한 바울은 마치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낸 자”(7:5)와 같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의 눈 속에 들어 있는 티와 같은 작은 허물들이 그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그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방법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7:5).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과거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함 받기 위해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리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갔듯이 이제는 바울이 형제들을 그 앞으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둘째,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깨닫게 된 복음과(14:17, 26)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하여(16:13-14) 형제들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28:19-20). 넷째, 믿음의 성숙을 이루도록 양육하며 도와주어야만 합니다(21:17). 다섯째, 그와 같은 과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정답이 바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7:5a)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의 다른 말씀이 제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