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3강(마4:12-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4. 02:12

마태복음 강해 제23(4:12-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29()

 

세례 요한이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에게 잡히어 가버나움 옥사에 갇힌 이유(11:2, 14:3-4) 및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4:12-17)

 

세례 요한이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에 대하여 질책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 안디바가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신의 여자로 취했기 때문입니다(14:3-4).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게 율법을 위반하였으니 회개를 하라고 종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레위기 제18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관련 율법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18:16). 분봉 왕 헤롯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쓴 소리를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영어(囹圄, 감금을 당함)의 몸이 되자 예수님의 행적에 몇 가지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사렛 예수가 갑자기 갈릴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4:12). 둘째, 그때부터 메시아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4:17). 셋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방문하여 요한의 질의를 전하고 답변을 구하고 있습니다(11:2-5). 왜 그와 같은 세 가지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돌보아야만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 자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3:11, 14, 1:29-30). 자신의 종이 악한 헤롯 왕에게 갇히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가 그곳으로 가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을 합니다; “왜 예수님은 막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26:53) 세례 요한을 옥에서부터 구출해내지를 아니하고 있을까요?”

정의의 사도인 세례 요한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하지를 아니하고 옥중에 내어버려 둠으로써 헤롯의 생일날 그만 목이 달아나고 맙니다(14:6-12).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등은 천사의 도움으로 곧장 옥문이 열리고 탈출을 하고 있습니다(12:7-17, 16:26-40). 하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그러한 기적이 발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구절이 예수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11),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4).

풀이를 간단하게 해보자면,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하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무덤 속 부활을 보지도 못한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보혜사 성령님(14:16-17)의 능력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8). 한 마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체험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3:5). 그러한 표현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11)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이 분봉 왕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목이 잘려서 죽도록 내어버려 둠으로써 성경은 역사 가운데 무엇을 성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그를 처형 전에 구해내지 아니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이 부르짖고 있는 메시지와 예수님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행동은 정의의 사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의가 아니라 공의를 실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결국 정의와 공의와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정의가 아니고 당연히 공의입니다. 그 이유는 정의는 사람이 신봉하고 있는 이기적인 의로움이지만 공의는 하나님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10:18).

예를 들면, 전쟁에 참전하는 아군과 적군은 모두 자신들의 전쟁목적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 정의가 옳은 것일까요? 두 쪽이 모두 옳지 아니하다면 양쪽이 모두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을 동원하고 있는 정의의 전쟁은 모두가 성경말씀과 어긋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26:52-56). 그러므로 아무리 세례 요한이 율법을 가지고 헤롯의 잘못을 질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과 어긋나고 있기에 공의가 아니고 정의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속에 대속의 죽음과 중보의 기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세례 요한은 정의의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둘째로,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정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를 못하고 그만 옥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제자들을 통하여 정보만을 듣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소문과 정보만 간접적으로 듣고 있으니 답답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의 역할과 예수님의 사역이 영 일치가 되지 아니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를 보내어서 과연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작업까지 하고 있습니다(11:2-3).

그러나 사도 마태는 달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복음사역이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을 했던 바로 그 사역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4:13-16).

셋째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버렸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사역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죽거나 옥에 갇히어버렸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그 자리에서 정지를 하거나 얼어붙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세대교체를 이루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세대교체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36개월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에 따라서 복음사역의 바통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소천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세대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사업이 넘어가게 됩니다. 일찍이 엘리야의 사역을 엘리사에게 넘겨주듯이(왕상19:16, 왕하2:9-15)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를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참고로, 세례 요한의 선지자로서의 특이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약시대의 사도나 선지자도 아닙니다. 그 중간지점에 어중간하게 서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400년이 지나서 유다의 땅에 등장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참으로 귀한 선지자입니다. 그렇지만 곧 이어 등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의 사역기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2) 그의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와는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에 대하여 질타를 하면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면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곧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하고 있으므로 회개를 하고서 모두들 그 길을 예비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반년 정도 앞선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므로 그는 신약시대의 빗장을 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그는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백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를 하고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급히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의 수행제자들마저 메시아를 따르도록 떠나 보내고 있습니다(1:35-40).

(4) 세례 요한이 가버나움 헤롯의 궁에서 처형이 되자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활성화되고 있습니다(4:12-17). 가버나움은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당연히 그곳에 분봉 왕 헤롯의 왕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찾으러 온 적이 있는 헤롯의 신하도 가버나움에 살고 있습니다(4:46). 그리고 북부의 큰 세관도 가버나움에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에 의하여 제자로 합류하게 되기도 합니다(9:9, 2: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