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1강(마4:5-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3. 03:02

마태복음 강해 제21(4:5-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27()

 

마귀의 시험 가운데 신앙생활에 있어서 두 번째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과 그 대처방안(4:5-7)

 

마귀의 시험은 절묘하게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약점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생존의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므로 마귀는 사람의 그 약점을 가장 먼저 노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시험문제를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40일간 금식을 방금 끝낸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서 시장기를 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은밀하게 유혹을 했습니다(4:3). 그러나 마귀는 유혹에 실패하게 됩니다. 너무도 완강하게 예수님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떡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생의 떡이 훨씬 중요하다고 반격을 가했기 때문입니다(4:4).

첫 번째 시험과 유혹이 실패로 끝나자 마귀는 사람의 그 다음 약점을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실족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출애굽기 제17장 앞부분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산 호렙이 가까운 르비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17:2, 7). 그 이유는 마실 물이 바닥이 났기 때문입니다(17:1). 갈증은 심해오는데 르비딤 광야에서 물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들에게 샘물을 얻게 해주면 고마우신 하나님입니다. 크게 환영하고 찬양을 할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으로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샘물을 얻도록 조치해주지 아니하시면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한 무능한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곧바로 버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구주의적인 신앙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는 그러한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들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아니하신다면 그때는 별볼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종처럼 부리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하수인으로 부리고자 하고 있으니 그것이야 말로 패역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는 ‘맛사’의 속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똑 같은 일이 다시 공생애를 막 시작하시려는 예수님 앞에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마귀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신앙자세를 시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높은 성전의 꼭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한번 뛰어 내려보라. 하나님이 사자들에게 명령하여 틀림없이 너를 받들어 사뿐하게 바닥에 착지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4:5-6). 그리하면 그들 백성들은 너의 능력을 보고서 너에게 복종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라도 보여줄 수 있는 너를 그들이 경외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사실 올바른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성도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극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주객이 전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취급하면서 자신들에게 그저 복을 가져다 주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기복신앙이며 도구주의적인 신앙의 진면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이 어떠한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인지를 금방 눈치를 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응수를 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4:7). 참고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3:14)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첫째,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부리거나 흔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피조물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항상 스스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실 수가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을 감히 피조물인 사람이 자신의 명예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사람 앞에서 마치 자신의 하인처럼 부리고자 하고 있으니 그 죄악과 허물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피조물인 송아지의 형상으로 금칠을 하여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경배하고 축제를 벌였던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무지보다도(32:1-7) 더 엄청난 과오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날 실용주의와 도구주의에 함빡 물이 들어있는 현대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못하면 범하기가 쉬운 과오가 바로 위와 같은 마귀의 두 번째 시험입니다. 세상에서 교회의 리더로서 이름을 날리고 성공을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특히 그와 같은 약점이 쉽게 노출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 섰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부터 이 두 번째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강력하게 4:7’절 말씀을 가지고 대처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