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강(마3:13-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1. 06:22

마태복음 강해 제18(3:13-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24()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셨는가?(13-17)

 

400여년 만에 유대 땅에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요단 강에서부터 소문이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외세치하에서 살아오면서 하루속히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해방을 시켜주고 다윗 제국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는 기미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 흔했던 선지자조차 그 땅에 수백 년 동안 나타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답답하던 시절에 드디어 선지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으니 자연히 백성들의 시선이 요단 강가로 모이고 있습니다(3:5).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고 부르짖는 선지자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서 회개의 뜻으로 물세례를 받고 있습니다(3:6).

그렇게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한창 백성들에게 물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변방 갈릴리에서 온 한 청년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겠다고 나아왔습니다(3:13).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장소가 바로 요단 강 동편의 오아시스 마을인 또 다른 베다니입니다(1:28, 11:1). 그곳에서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 발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대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태도가 참 이상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3:14).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이 지나서 나타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참으로 귀하신 분입니다. 그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사람에게도 기름을 부을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왕상19:15-16). 그런데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세례 요한이 감히 그 시골 청년에게 세례를 줄 수가 없는 낮은 신분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 청년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얼핏 머리를 스치고 있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이 바로 메시아인가?

요단 강가 베다니 마을에 모여있던 백성들의 시선이 갑자기 갈릴리 출신 청년 예수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합당하니라!”(3:15). 그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 요한이 메시아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3:15-16).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꼼꼼히 챙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여기서 합당(合當)하다라고 하는 뜻은 하늘의 이치에도 땅의 이치에도 모두 맞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3:16-17). 그 아들이 아니면 도저히 이 세상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이제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때입니다(6:10). 그 말은 땅의 이치에도 맞아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타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이치에 맞게 유대인의 왕이 될 수가 있으며 백성들이 그에게 복종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 옛날 모세와 다윗에게 복종을 하듯이 만들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2:2, 27:37) 정통성을 부여하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 의식이 바로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의식은 여기에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3:16). 왕에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더구나 성부 하나님의 음성까지 울려 나오고 있으니(3:17)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의 자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까지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제는 나사렛 예수의 그 거룩한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첫째, 유대인의 왕이 되는 절차를 거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의 강림과 하나님 음성이 임하게 되는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의 뜻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들의 인정함을 받는 정의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이제는 백성들이 그 권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장차 메시아 예수의 권위를 부인하자면 세례 요한의 선지자의 자격부터 문제를 삼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에 비추어서 세례 요한이 결코 부족한 점이 없으며 당연히 선지자의 한 사람이라고 백성들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점에 대하여 증거를 하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1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1:23-27).

둘째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종인 세례 요한에게 허락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인 상전이나 주인의 허락을 구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혀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창조주이십니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사람들에게 닮도록 창조를 했습니다(1:26-27).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도 만들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형상을 존중하듯이 그것을 닮아 있는 창조물인 인간의 것도 존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함께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표현이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라는 구절입니다.

셋째로, 그와 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듣게 된 세례 요한은 저절로 그 머리가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그대로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존중을 받았으니 그 분을 존중해드리는 것이 심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정성으로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3:15). 그때 그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3:16). 믿음과 순종이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있습니다(1:32-34). 성령의 움직임이 그의 눈에 보이기를 시작합니다(3:8). 동시에 그의 귀도 열리고 있습니다(3:17). 영적인 안목과 귀가 열리고 있으니 그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이야말로 천국을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있는 선지자가 되고 있습니다(3:3). 그러므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11).

결론적으로, 그토록 위대한 세례 요한이 참으로 메시아 앞에서는 겸손합니다. 종으로서의 분수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이 역시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종이(1:1) 되고 있는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다음 대목과 같은 세례 요한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1) “내가 당신(예수님)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3:14).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하나님 아들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성도가) 되게 하시리라”(3:9). 성도가 되었다고 이방인을 차별하며 이상한 선민사상으로 주님의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3)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3:11). 그리스도는 창조에 참여하신 나의 주인이시며(1:1-4) 나는 그의 지음을 받은 종이라는 인식이 확고합니다.

(4)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1:23). 주군이 행차를 하시는 그 길에 나는 주님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 땅에서 사라지지만 그것은 그냥 퇴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4:25).

(5)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29-30). 그리스도를 높이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세례 요한의 지극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부럽고 닮고 싶은 하나님의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요컨대, 예수님 제자의 도리도 그 모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아니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