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6강(마3:1-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0. 22:12

마태복음 강해 제16(3:1-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22()

 

세례 요한의 삶의 모습과 종의 태도에 관한 묘사(3:1-17, 1:29-36)

 

세례 요한의 삶의 모습은 한 마디로 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보통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금욕주의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며 성령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음식으로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서 지내고 있습니다(3:4). 여기까지 묘사된 것은 전형적인 금욕주의’(the acetic life) 모습입니다. 고대 헬라사회나 중근동 지역에서는 세속을 떠나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도인(道人)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이 조성된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깨닫기 위하여 집을 떠나서 오지(奧地)에서 홀로 생활을 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나는 자연인이다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로 광야, 깊은 숲 속, 또는 외딴 섬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유대교의 엣세네 파나 하얀 순교자’(the white martyr)를 꿈꾸는 기독교의 특정 종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도교, 힌두교, 헬라 철학자 등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엄연한 차이 하나가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둘째로, 그 차이는 한 마디로 명상’(meditation)묵상’(contemplation)의 차이와 같습니다. 흔히 화두(話頭)만을 가지고 깊은 깨달음을 얻고자 정신적인 수련을 하는 명상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묵상에 대하여 그 차이를 모르고 모두가 명상인 것으로 생각하고서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현저합니다. 그렇지만 그 차이를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 때에 창조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4:4). 성도들은 창조주를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창조주의 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결코 자신의 영적인 야망 또는 세상적인 욕심을 성취하거나 단순히 자신의 탐구욕을 만족시키거나 나아가서 물질적인 떡을 얻기 위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그 차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창조주의 뜻을 먼저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합니다. 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여기서 묵상이며 금욕주의입니다; “천국을 건설하고자 오시는 주의 길을 회개함으로써 예비하라고 백성들에게 외치는 자”(40:3, 3:2-3, 1:2-4, 3:3-4, 1:23)로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서를 공부하고 예언자들의 말씀 가운데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입니다(3:1, 4:5-6, 40:3). 그 다음에는 그 사명을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가 있을지 그것을 묵상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금욕주의적인 삶을 영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나 철학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선지자의 예언을 붙들고서 깊이 성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창조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세상창조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고 자연생성의 에너지를 명상을 통하여 얻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력구원의 신앙이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신이 되고자 하는 종교라고 명명할 수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의 두뇌와 마음 속에 무슨 그리 대단한 선함과(10:18) 능력이 숨어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하늘의 이치와 땅을 다스리는 모든 비결을 스스로 터득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 구원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만물을 다스리는 힘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습니다.

헬라세계에서는 그렇게 하여 이치를 깨닫게 된 자를 철학자’(philosopher)라고 말하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가 소위 철학 왕이 됩니다. 철학 왕이 다스리는 도시국가(polis)가 가장 번영을 누린다고 하는 사상이 인본주의 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만이 모두의 복지를 증진할 수 있는 일반의지(the general will)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 와서도 그러한 천재를 왕처럼 섬긴 사회가 바로 유럽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독일의 히틀러가 바로 그와 같은 사상의 정점에서 유럽사회 전체를 한때 호령했던 인물들입니다.

셋째로, 세례 요한이 자신은 메시아의 종이라는 사실을 거듭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요한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3:15)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6-17).

흥미로운 사실은 의사 누가가 적고 있는 위의 말씀을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수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 굵은 글자로 표시한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일치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자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의사 누가가 사도 마태의 글을 수집하여 옮겨 적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곧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3:18). 의사 누가는 세례 요한의 행적에 관하여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분명히 사도 마태가 쓴 복음서의 기록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에는 그와 같은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사 누가가 왜 사도 마태의 복음서를 이 대목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누가의 관심사항이거나 아니면 데오빌로각하(1:3)의 관심사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치권을 허용해주었지만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규제와 사찰의 끈을 놓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유대교지도자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과 사상적인 대립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백년 만에 선지자로 보이는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등장하여 물세례를 주자 백성들이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서 많이 몰려들고 있습니다(3:5). 그 자리에서 세례 요한이 현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3:7). 기존 유대교의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보당국이 예의 주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사도 마태의 복음서에서 적나라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사 누가가 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넷째로, 세례 요한이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한다(3:11a). 봉건사회에서는 주군의 신발을 따뜻하게 간수하는 자가 바로 가까운 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세 일본의 통치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한때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간수하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2)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3:11b). 회개를 하는 자에게는 물세례가 베풀어집니다. 그것은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3:6, 3:26, 4:1-2). 하지만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거나 불로 심판을 행하는 것은 창조주의 권한입니다. 예수님도 14:16’절 및 20:22’절 그리고 24:49’절 및 1:8’절에서 그 대목을 거듭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성령이 그 분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가 하늘에서 있었다(3:16-17). 세례 요한이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다는 기록은 사도 요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1:32-34). 세례 요한이 메시아를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종의 신분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청지기의 일에 충실하였기에 위와 같이 엄청난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례 요한의 영적인 경지는 성령님이 비둘기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고 있다는 장면까지 목격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3:8). 영적인 눈을 확실히 뜨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세례 요한만큼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걸고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