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강(마3:7-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0. 22:10

마태복음 강해 제15(3:7-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21()

 

선지자 세례 요한의 등장 기사에 있어서 사도 마태는 마가의 기록에 무엇을 덧붙이고 있는가?(3:7-12)

 

복음에 대한 사도 마태의 깨달음은 과연 무엇일까? 환언하면, 그는 마태복음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마태복음을 읽어가면서 묵상을 해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물론 사도 마태는 자신의 신상이야기가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는 저자인 마태의 복음에 대한 관념이 자신의 깨달음으로서 그대로 담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저자가 객관적으로 글을 쓰려고 해도 그 사람의 저작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주관성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이미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깨달음이 복음서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터져 나오고 있는 장면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유대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도 마태의 생각이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달이 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요단 강에서 물세례를 주면서 선지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로 나아오고 있습니다(3:5-6). 그 가운데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갑자기 그들을 상대로 하여 거친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모욕적인 비난을 한 다음에 그들이 임박한 진노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입니다(3:8-12). 그 뜻은 그들을 고쳐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백성들의 수준이나 처지라고 하는 것이 그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마태가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서 복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렬하게 서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마치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던 냇물이 돌덩이에 부딪혀서 갑자기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마가는 그냥 담담하게 세례 요한의 등장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데(1:4-8) 비해서 사도 마태는 그 반대입니다(3:1-12). 요컨대, 마가가 무심코 흘려버린 대목에서 사도 마태가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받기 위하여 좋은 의도로 자기 앞에 나아오고 있는 두 종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갑자기 독사의 자식들아!’(3:7)라고 일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모욕적인 언행입니다. 보통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모욕적인 언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충격적인 장면에서 도대체 사도 마태는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복음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생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고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당시 유대교를 이끌고 있던 대표적인 두 종파입니다. 그들은 공통점도 있으며 차이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외세를 인정하면서 유대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함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종파는 모두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자주적으로 유대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1) 사두개인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서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종파입니다. 그들의 수장이 대제사장인데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로마제국의 인준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제도적으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헤롯의 왕가처럼 로마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2:4-5).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교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리에 대한 유권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교법사 가말리엘입니다(5:34).

(2)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오경만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 대신에 그들은 종교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의 권위는 히브리 경전 전체에 대한 설명력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기살기로 히브리 바이블을 빠짐없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를 이어서 주석을 달아가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3)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비극적입니다. 그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수백 년간 구약을 해석하고 히브리 사상과 전승을 가지고 백성들을 교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며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복음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외식적이며 선민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요한복음에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3)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 여기 마태복음(3)에서는 세례 요한과 유대교지도자들과의 만남 가운데서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사도 마태가 덧붙이고 있는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하여 사도 마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엄청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용어를 구사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질책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독사의 자식들아!’(3:7)라고 하는 표현은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담부부를 타락시킨 장본인이 옛 뱀인데(3:1) 그 정체가 사탄또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20:2). 사탄과 옛 뱀은 용서함을 받지를 못하고 종말로 영벌에 처해지는 진노의 대상입니다(20:10). 그러므로 사도 마태는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서 그들 유대교지도자 그룹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하고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3:7b).

둘째로, 질책하고 저주하는 것 같으나 그 말 속에는 제대로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설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도 마태의 글이 복음서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라(3:8). (2) 아브라함의 자손인 선민이라고 자랑하지를 말라(3:9). (3) 물세례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와 불 세례를 모두 받도록 하라(3:11).

셋째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경우를 막달라 마리아와 삭개오의 경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7귀신을 쫓아내고 자신을 낫게 해준 예수님이 고마워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8:1-3).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끝까지 동행을 한 것입니다. 복음을 배우며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현장에까지 따라갑니다(27:56). 그리고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28:1, 20:16). 평생을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삶입니다. (2) 여리고의 세관장이었던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19:2, 7). 그렇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돌아보시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그의 마음 속에서 큰 깨달음과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착취한 것이 있으면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두 배가 아니라 자신은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합니다(22:4, 19:8, 10:21-27).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자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이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19:9-10). 율법의 규정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삶의 결단을 삭개오가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3:9).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현저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지 결코 그의 혈통이 대단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몸을 젊게 만들어서 10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도록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만들어준 아들이라는 측면이 더 강한 것입니다(21:1-7, 22:12). 더구나 137세에 상처를 한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와 함께 살면서 아들 6명을 낳아 길러서 모두 분가를 시키게 됩니다(25:1-7).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아들을 생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아들을 노년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9)는 사도 마태의 글은 선민들에게 혈통에 의거하고 있는 선민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서 평생을 이방지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선지자였습니다(12:1-5, 20:7). 그러므로 단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자랑을 하는 선민사상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도 마태의 주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세례 요한이 그 옛날 구약상의 선지자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세례를 주고 있으며 장차 오시는 메시아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종류의 세례를 가지고 사도 마태가 복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1) 물세례는 제사장들이 성막봉사를 하기 위하여 물두멍의 물로써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30:18-21, 40:12). 80세의 미디안 양치기 모세가 호렙 산 가시나무 떨기에 붙은 하나님의 불 앞에 가까이 갔을 때에 그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3:5).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행하는 일종의 결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라고 하겠습니다. (2) 성령세례는 믿는 자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6:19’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불 세례는 불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이 세상에 심판의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2:49).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영생을 위한 성령의 세례가 있겠지만 반대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불이 임한다는 풀이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 세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소멸하는 불로써 복음에 반대하고 있는 자신의 겉 사람의 욕심과 옛날 버릇을(7:23-24) 모두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릴 때에 성령의 능력이 임할 것이며(1:8, 2:1-4) 영적인 삶이 가능해진다고 하겠습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