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3강(마2:19-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20. 03:25

마태복음 강해 제13(2:19-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19()

 

예수님 가족이 애굽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다시 나사렛으로 이주를 하다. 그 가족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헤롯 왕가의 변화(2:19-23)

 

예수님의 가족구성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2) 마리아의 남편은 목수 요셉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붓아버지가 되고 있습니다. (2) 목수 요셉이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출생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1:18, 1:34-38).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가정이 지니고 있는 가문의 특수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목수 요셉은 다윗 왕가의 후예입니다(1:20). 그리고 마리아는 초대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입니다(1:5, 36). (2) 다윗 왕가와 대제사장 집안의 연합은 과거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떠받치고 있었던 두 개의 기둥입니다. (3)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살다가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도움으로 그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때에도 백성들의 지도자는 다윗 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예수아입니다(3:8). (4) 그렇지만 유다 지파 느헤미야 총독의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나자 다윗 가문의 힘이 급격히 사라집니다. 그때부터 대제사장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종교적인 자치권을 겨우 보장받고 있습니다(13:7, 28).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그러합니다(2:4-6, 27:1-2). (5) 물론 도중에 제사장 마카비 가문의 독립운동과 그 레위 지파 가문의 후예들이 하스모니안 왕조를 이룬 시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 왕조의 재건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시절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강한 힘을 가진 외세를 의지하여 자신들의 유대교와 성전을 지켜나가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것이 소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적 지배시대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윗 가문과 대제사장 가문의 결합으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 진원지가 바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가문에 하나님께서 크게 힘을 실어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그 집안에서 탄생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1:21-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사역 전체에 이르기까지 친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보호하심이 각별합니다. 사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 본문에서는 당장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가정의 가장인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현몽을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의 현몽은 주의 사자를 보내어서 꿈 가운데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2:19). 그 내용은 헤롯 대왕이 죽었으니 애굽에서의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2:20). 참고로 헤롯 대왕은 주전 4년경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해에 예수님이 탄생을 했다고 보면 아기 예수를 살리고자 하는 목수 요셉 부부의 애굽 피난생활은 생각보다 짧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 목수 요셉은 예루살렘의 정치현실에 대해서 소문을 듣게 됩니다. 헤롯 대왕이 죽자 세 명의 왕자가 권력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른 바 분봉 왕입니다. 그 가운데 헤롯 아켈라오가 예루살렘과 좁은 의미의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왕인 헤롯 대왕을 닮아서 포악한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수 요셉이 고민을 합니다. 훌륭한 자식을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해서는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키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합니다(2:22a). 그러자 꿈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나타납니다. 걱정하지 말고 고향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그곳에서 예수님을 잘 키우라는 것입니다(2:22b-23).

이제 예수님의 성장과 공생애의 준비 등 모든 문제는 성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목수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아들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나중에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게 되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상당히 흔한 이름이므로 그 앞에 고향이라는 지명이 붙어서 구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사실은 베들레헴태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나중에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고 있는 가나출신 나다나엘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는 친구 빌립이 나사렛 예수를 따르자고 권유했을 때에 부정적입니다. 그 이유는 변방 갈릴리의 벽촌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탄생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1:46). 만약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는 이사야 예언과 미가의 예언 그대로 이새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11:1, 삼상16:1, 5:2).

그렇다면 4복음서에서는 어떻게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는 그들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8-11, 2:4-7). 특히 의사 누가는 왜 목수 요셉 부부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까지 먼 여행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이 로마황제의 명령 때문에 호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고향 베들레헴을 방문하다가 아들 예수를 얻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2:1-5). 그러나 마가와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의 경우에도 베들레헴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 절반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형편이므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나사렛 태생으로만 알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강조하지를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이제는 크게 중요하지가 아니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는 출생지역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부장적인 족장사회이며 신분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도 그 점을 감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제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 새 언약 복음의 역사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과 기득권이라는 기존의 차원을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1:12-13).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거듭난 그때부터(3:5) 성도들이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6:33a). 그 일을 전심으로 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이제부터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권세와 성령님의 능력이 총력적으로 뒷받침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33b, 28:18-20, 1:8, 1: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