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2강(마2:14-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9. 11:10

마태복음 강해 제12(2: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18()

 

베들레헴 일대 유아들의 살해사건 및 아기 예수의 애굽 피난사건을 출애굽기의 유월절 출애굽 사건과 비교해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2:14-18, 12:29-51)

 

두 사건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

출애굽기 제1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참혹한 유월절 밤의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12:29-3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 제국의 노예에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출발을 하고 있는 그 첫 마당에 의미심장하게도 애굽 땅에서의 살육과 큰 부르짖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건이 1,4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자 묘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베들레헴 지역에서 다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2:16-18). 그 차이가 무엇이며 두 사건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건의 발생지역과 탈출의 경로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애굽 인들이 살고 있던 땅에서 곡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애곡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18). 그리고 아기 예수와 그 부모는 애굽으로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2:13-14). 그 경과를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 대왕은 메시아가 아기로 태어난 정확한 장소를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왕궁에 들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고서 헤롯 대왕은 분노합니다(2:16a). 그는 차선책으로 그 인근지역의 두 살 미만의 사내아기를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을 합니다(2:16b). 그런데 아기 예수와 그 부모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무자비한 아기살해의 현장을 피하여 이미 애굽으로 탈출을 했습니다(2:13-15)”.

둘째로,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바로와 신하들이 완악했습니다(9:34-35).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마지막 재앙으로서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에게 죽음을 내렸습니다(12:29-30).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악합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제사장나라로서의 역할을 맡겼는데 그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선민사상에 빠져서 이방인들을 차별하면서 멸망의 대상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는(18:20-32) 거룩한 백성들이 되라고 오랜 세월 하나님이 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종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7:51-52). 그래서 제사장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후 유다의 유민들 가운데 일부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여전히 선민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자신들 선민들만 구원해주시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는 그 시점까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그 결과 그 옛날 애굽 땅에 있었던 유월절 사건이 이제는 예루살렘과 그 인근 유대 땅에서 발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과 장성한 메시아의 죽음

그 옛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끄집어내기 위하여 열 번째 재앙으로서 유월절 사건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는 애굽인 부모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 자식인 장남들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정치적 탄압과 잘못된 종교적 관행에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십니다. 그 일을 수행하게 될 메시아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도 무죄한 아기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메시아가 그 땅에서 더 처참한 피를 흘리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요컨대,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이 필요했다고 한다면 장차 백성들이 눈물로 회개를 하고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어떠한 희생이 필요할까요? 한 마디로, 세상적인 압제와 굴레를 벗겨주는 것보다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그 마음의 중심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희생의 제물이 요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제물은 세상사람들이 마련할 수 있는 제물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여호와 이레’(22:14)의 은혜로서 준비하셔야만 되는 거룩하고도 완전한 제물입니다.

그 제물이 바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입니다. 참고로, 그 제물이 바쳐진 장소가 십자가 처형장이 있는 골고다 언덕입니다(27:33). 그곳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보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가 신비롭게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고자 올라갔던 그 모리아 산입니다(22:2-3).

 

야곱의 애처 라헬의 죽음과 라마가 아닌 베들레헴에서의 애곡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야곱입니다(32:28, 35:10). 그는 22첩을 거느리고 있지만 유독 미인 라헬만을 사랑했습니다(29:17-18, 31). 남편의 사랑을 믿고서 라헬은 신앙생활을 등한시했습니다. 그래서 친정 아버지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치기도 했습니다(31:19). 그리고 아들을 줄줄이 생산하고 있는 언니 레아를 얼마나 질투했는지 모릅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라헬의 욕심을 대단합니다(30:14). 그녀는 마치 경쟁의 화신과 같습니다(30:1-2). 그래서 자신이 불임임을 알고서는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제공하여 두 아들을 얻기도 했습니다(30:3-8). 그 영향을 받아서 그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던(29:35) 레아마저 동생 라헬과 경쟁하고자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첩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30:9). 그 모습을 바라보고서 하나님은 라헬의 태를 열어 주었습니다(30:22). 그 결과 얻게 된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런데 라헬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들 하나를 처음으로 얻게 되자 당장 하나님께 아들 하나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뜻이 아들 요셉의 이름자가 되고 있습니다(30:24).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대신에 그녀의 목숨을 라마에서 거두고 계십니다(35:16-19). 라헬은 사랑하는 남편의 곁을 떠나기 싫어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난산 끝에 그만 객사를 하고 맙니다(35:18a, 19a). 그 즉시 야곱이 막내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35:18b).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기념하여 그녀의 소생 요셉과 베냐민을 그의 양팔로 삼겠다는 뜻입니다(37:3, 44:30-31). 그리고 라헬의 시신을 남쪽으로 운구하여 라마에서 16km떨어져 있는 에브랏 베들레헴에서 사흘 장으로 장사를 지내고 그곳에 묘소를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35:16-20).

옛날에 야곱의 애처 라헬의 슬픔의 통곡소리가 라마에서 터져 나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녀의 무덤이 있는 베들레헴에서 또 다시 큰 통곡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2:17-18). 왜냐하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헤롯의 군사가 모두 죽여버렸기 때문입니다(2:16). 그와 같은 사건이 베들레헴에서 발생할 것임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미리 알게 된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31:15). 그 대목을 사도 마태가 그대로 인용하여 2:18’절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조 유다 왕국이 망할 때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며 베들레헴에서 통곡이 있을 것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삼상16:1). 하지만 그 예언은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선민사상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오시는 그날에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만약 계속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게 되면 베들레헴에서의 통곡이 멀지 아니하여 예루살렘의 통곡으로 확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24:2)”.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은 그 예언의 뜻을 깨닫지를 못한 채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 그 결과 40년 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폐허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서의 통곡이 모든 유다의 땅으로 확산이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