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5강(마1:7-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7. 07:41

마태복음 강해 제5(1: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12()

 

두 번째 14대의 의미; 다윗 왕조의 빛과 어두움(1:7-11)

 

다윗 왕조를 열고 있는 다윗 대왕은 조그마한 이스라엘 왕국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고 한때 중동지역을 호령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인 솔로몬 대왕은 부왕의 후광을 입고서 탁월한 외교력으로 이스라엘 제국을 지켜낸 인물입니다. 그와 같은 부자의 모습은 한국의 고대사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왕국의 영토를 엄청나게 넓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장수태왕은 뛰어난 외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한국 사람들이 그 옛날 강성했던 고구려의 영광을 그리워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옛날 다윗 대왕과 솔로몬 대왕 때의 이스라엘 제국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후계자가 메시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사상입니다.

그런데 본문(1:7-11)에서는 다윗 왕조가 쇠퇴하고 망하게 된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왕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더 이상 왕가가 아닌 다윗의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자손 14대의 이름을 다시 싣고 있습니다(1:12-16). 그 마지막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면서 다윗 가문의 꿈이 바뀌고 있음을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 곧 다윗 대왕의 후계자이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가 꿈꾸고 있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그들이 바라고 있는 제국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는 나라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민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이 아니라 만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입니다. 그 뜻을 알게 된 사람들 가운데 다윗 가문의 후계자이며 나사렛 예수의 친동생인 장로 야고보와 유다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제국의 재건을 바라는 애초의 꿈을 접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겸손하게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건설 및 확장에 신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제국은 어떻게 운영이 되었을까요? 다윗 대왕의 후계자들은 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었을까요?

(1)  우선 다윗 대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 대왕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과 20세의 약관에 아버지 다윗 대왕의 후광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솔로몬은 40년간 이스라엘 제국을 통치하면서 명암이 엇갈리는 공적과 과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 20년 동안은 부왕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겸손하게 제국을 잘 통치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20년 동안에는 이방의 여인을 끌어들이고 이방 신을 섬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왕상11:1-13). 그리고 전국을 요새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중 과세에 시달리게 합니다(왕상9:15, 19, 12:4).

(2)  그 결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둘로 쪼개어지고 맙니다(왕상12:20). 그 후 13명의 왕들이 그 뒤를 이었지만 다윗 왕조는 신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에 의하여 주전 586년에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25:2-7).

(3)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14대 곧 솔로몬 대왕부터 여호야김 왕 때까지는 왜 이스라엘 제국이 둘로 갈라졌으며 결국은 세상나라에 의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과 빛이 계속되지를 못하고 제사장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타락하여 세속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왕하21:11, 16). 선민임을 자랑하면서도 더 이상 하나님을 겸손하게 섬기지를 아니했습니다.  교만하게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우상만을 끌어들여서 섬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아예 우상의 하나로 치부하여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실익이 없는 허울뿐인 제사장나라를 보호해줄 가치를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윗 왕조의 비극이며 선민 이스라엘의 어두움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자 노력한 왕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뿌리깊은 우상숭배사상을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합니다. 마지막 노력은 요시야 왕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선대 므낫세 왕 때의 잘못을 모두 바로잡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합니다(왕하22:3-20). 그의 요절로 인하여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은 외세에 휘둘리게 되는 말세를 맞이하게 됩니다(왕하23:29).

(5)  그런데 다윗 왕조라고 하더라도 북조 이스라엘 왕국처럼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추구했다는 공통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19:18-25, 4:11)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계획을 그들 선민들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오만함과 교만 가운데 제사장나라를 운영했습니다. 그 결과 주전 586년에 다윗 왕조가 망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선민만의 영광을 추구하는 제사장의 나라가 이 땅에 나타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기를 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가 아닙니다. 왕이 하나님의 복을 대신 받아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라입니다. 그와 같은 백성들의 생각이 왕정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번 고찰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정은 베냐민 지파 출신 초대 왕 사울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대 사사이며 대 제사장은 사무엘이었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어서 늙어갈 때에 백성들은 사무엘 이후를 걱정했습니다(삼상8:1-5). 그 이유는 사무엘의 아들들 가운데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삼상8:3-5).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탁월한 영도력에 힘입어서 그 동안 주변 족속들의 침입을 격퇴해왔지만 그 다음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열두 지파의 힘을 사무엘처럼 결집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곧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에 흩어져 있는 사사들과 제사장들의 면면을 모두 살펴보아도 적합한 인물이 없습니다.

둘째로, 백성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은 모두 왕정국가이므로 그 군사력이 막강합니다(삼상8:19-20). 그런데 이스라엘만은 열두 지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탁월한 대 사사가 나타나야만 지파의 힘을 결집시킬 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여러 지파의 힘을 동원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사이에 적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불편한 제도를 유지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늙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부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자신들에게도 왕정을 실시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해달라는 것입니다(삼상8:4-5). 그 결과 얻게 된 최초의 왕이 용사들의 후예인 베냐민 족속 출신 사울 왕입니다(20:47, 삼상9:1-2, 17).

셋째로, 백성들의 부탁으로 사무엘이 여호와에게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두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삼상8:6-18). 그 이유는 모세가 일찍이 신명기에서 적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17:14-20). 한 마디로, 사람이 왕과 같은 절대권력자가 되면 자신 위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절대권력은 교만을 낳고 결국 부패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신앙인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워낙 강력하게 왕정을 희망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별로 원하지 아니하는 허락(unwilling permit or reluctant to allow)을 하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넷째로, 가장 약체가 되어버린 베냐민 지파에서 초대 왕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열두 지파의 협조가 없으면 베냐민 지파의 힘만으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일본의 자민당이 파벌정치를 계속할 때에 가장 세력이 약한 파벌에서 수상을 선출한 이유와 유사합니다. 둘째, 자신의 세력이 약하므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열심히 매어 달리는 왕이 될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강한 적을 몇 차례 물리치자 사울 왕의 인기가 치솟게 됩니다. 그는 교만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백성들의 인기를 자신의 힘의 원천으로 삼고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권유를 따르지 않게 됩니다(삼상13:8-14, 15:10-23). 마침내 자신의 능력으로 적을 토벌한 것으로 믿고서 왕정을 강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더 늙어버린 사무엘에게 이제는 사울 왕처럼 타락하지 아니할 신실한 후임자를 물색하도록 내밀하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계십니다(삼상15:35, 16:1). 과연 그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를 할까요?

다섯째로, 유다 지파 이새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이 택함을 받게 됩니다(삼상16:1, 11-13). 이새의 집을 방문한 사무엘은 자신 앞에 차례로 나아오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장남, 차남, 삼남 모두가 준수하며 장군감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16:6-9, 17:12-13). 마치 사울 왕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장남을 왕으로 선택하는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삼상16:6). 그러나 하나님께서 급하게 막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동일한 이유로 이새의 아들 7명이 모두 거절을 당합니다. 그들이 왕으로 선택을 받게 되면 역시 사울 왕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이새의 마지막 여덟 번째 아들이 다윗입니다(삼상16:11). 아름다운 미소년이지만 형들처럼 키가 크거나 용력이 출중하게 생기지는 아니했습니다(삼상16:12). 그러나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게 되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그를 통하여)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13:22)는 것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다윗 왕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모두 이루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렇게나 믿었던 다윗 대왕도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막바지에서 넘어지고 맙니다(삼하11:1). 신하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취하게 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삼하11:4). 더구나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자 우리아 장군마저 전사를 당하도록 만들고 맙니다(삼하11:15-17). 십계명을 어기고 있는 다윗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있는 다윗을 생각하여 그의 후계자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지만(왕하19:34) 14대가 흘러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기대를 거두어버리고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제1장 제1절과 제17절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27:37)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활약이 기상천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가운데 사도 마태는 다윗 왕조가 구현하지 못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