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4강(마1:1-6, 17a)(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7. 07:40

마태복음 강해 제4(1:1-6, 17a)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11()

 

첫 번째 14대의 의미;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 왕조의 성립(1:1-6, 17a)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제일 처음에 위치하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잡고 신약성경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마태복음 제1장부터 펼쳐서 처음 부분을 읽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골치 아픈 족보 이야기가 가장 먼저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기술이 한참 계속이 되고 있는데 그 이름자 가운데 아는 이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마태는 왜 그렇게 인기가 없는 유대인들의 족보자랑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직계조상도 아닌 다윗 왕가의 족보를 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하면서 무리하게 싣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속에 무슨 복음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1장 제1절부터 제17절 사이에 실려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 대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1:1). 둘째, 다윗 대왕의 왕권을 직접 승계하고 있는 솔로몬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이방 여인 4명이 그 조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1:3-6). 셋째,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유다 지파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과 다윗 대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셋으로 쪼개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더라”(1:17).

처음 두 가지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이미 세 번의 강해에서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머지 두 개의 메시지에 대해서 묵상을 할 차례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가 그 리더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 조상 유다가 창세기의 기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성품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제2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다는 다음과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이복동생 요셉의 목숨을 살리고 동시에 다른 형제들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고자 요셉을 살려서 애굽의 노예로 팔자는 제의를 합니다(37:26-27a). 모두가 살 수 있는 대안이므로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서 그렇게 처리가 됩니다(37:27b-28). 둘째, 맏며느리 다말이 과부가 되고 친정에 돌아가서 살고 있는데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38:24a). 율법에 따라서 불태워 죽이라고 유다가 명령을 합니다(38:24b). 하지만 다말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임신을 했다고 하면서 유다 자신의 담보물을 인편으로 보내어 옵니다(38:25). 만약 족장인 유다가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모른 체하게 되면 다말은 죽고 자신은 떳떳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다말의 말이 옳다고 인정을 해주면서 뱃속의 아기까지 살려주고 있습니다(38:26-27). 그 줄기에서 훗날 다윗의 가문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38:29, 1:3-6). 셋째, 애굽의 총리 집에 꼼짝없이 노예로 살게 될 막내 동생 베냐민을 구원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자신이 막내 동생 대신에 종이 될 터이니 부디 베냐민을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44:33). 그 이유는 아버지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44:32). 그리고 베냐민을 잃어버리게 되면 노인 야곱이 살 의욕을 완전히 상실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44:22, 31, 34). 유다의 자기희생적인 설득은 요셉 총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45:1). 마침내 형제들 사이의 대 화해의 장이 마련이 되고 있습니다(45:3-15)”.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 자체가 크게 융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파는 위축이 되고 있는데 비해서 유다 지파만은 그 수가 늘어나고 발언권이 커지며 더불어 그 영향력이 자꾸만 커지고 있습니다(14:6-15:15, 왕상12:21).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유다라는 이름이 그 이름을 대신하게 되는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왕하18:9-25, 19:32-35). 도대체 어떠한 비결이 유다 지파의 강성함과 융성함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비결은 한 마디로, 엄청난 포용력과 개방성향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고대사에 있어서 세 나라 가운데 제일 약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 노하우와도 비슷합니다. 물론 신라가 비겁하게 외세인 중국의 도움을 받아서 강성한 나라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쳤다고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곧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의 마음을 얻어서 대국인 당나라의 군대를 몰아내고 있는 역사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저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신라만이 보여주고 있는 엄청난 포용력과 개방의 성향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첫째, 종교적으로 신라는 귀족만의 불교를 온 백성의 불교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리를 쉽게 만들어서 왕족이 앞장을 서서 보급을 시킨 것입니다. 무서운 사상적인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둘째, 사회적으로 귀족의 자제와 평민의 자제를 함께 화랑도 정신으로 훈련을 시킵니다. 비록 귀족의 자제가 리더인 화랑이 되고 일반백성의 자제가 그 낭도가 되고 있지만 청소년 때부터 함께 수련을 하며 공동체생활을 했으므로 그 우정과 끈끈한 전우애는 대단한 것입니다. 셋째, 외교적으로도 그 포용력은 가야를 정복하면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대담하게도 망한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하여 신라의 상류사회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김유신 장군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마치 에서의 자손 그나스의 후예인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36:11, 32:12, 1:13) 유다 지파의 족장이 되고 가나안 남부지역을 정복하게 되는 역사가 연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다 지파는 역사적으로 베냐민, 레위, 시므온 등 다른 지파와 연합을 잘 하고 있습니다. 600명의 용사만이 남게 된 베냐민 지파를(20:47-48) 잘 돌보면서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왕상12:21). 유다 지파는 베냐민 출신 사울 왕을 잘 도와줍니다(삼상17:12-15). 그리고 그 끈끈한 유대는 남조 유다 왕국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18:11, 왕상12:23). 훗날에는 베냐민 지파에서 사도 바울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3:5). 제사장 가문이며 성전에서 일을 하게 되는 레위지파는 항상 유다 지파와 긴밀하게 하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다의 다윗 왕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있는 레위 지파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습니다(1:5). 그리고 유다지파는 자꾸만 왜소해지고 있는 시므온 지파에게 자신들의 정복지역의 일부를 할애해주는 아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시므온 지파는 갈렙이 정복했던 가나안 남부지역 가운데 서남부의 땅을 분깃으로 가지게 됩니다(19:1).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미디안 등의 후손 그리고 손자인 에서의 후손 또는 아브라함의 친척인 나홀과 롯의 후손까지 흡수하게 되는 개방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을 도운 장군들의 명단에는 헷 족속 우리아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삼하23:39). 그리고 다윗 왕가에는 아브라함의 장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 여인 룻도 조상으로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4:13-22, 1:5). 미디안 족속 가운데 레위 지파 모세의 처가가 훗날 이스라엘로 편입이 되고(10:29-33) 그 후에는 유다 지파와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1:16). 에돔 족속도 나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하여 가나안 남부에 정착하여 이두매 족속으로 살게 됩니다(3:8). 물론 그 왕가인 헤롯이 한때 유다의 땅을 지배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유다에 하나로 흡수가 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유다 지파의 성향을 확대해석을 해보면 그것은 마치 중국의 중화정책을 중동 땅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묘하게도 미국의 아메리카니즘과 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폐쇄적인 선민의 종교 유대교를 지니고 있지만 반면에 그와 같은 개방과 흡수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에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강대국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세 개로 쪼개고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 대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나아가서 14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입니다.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에서 다윗 대왕에 이르기까지 14대가 맞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 , 아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등 14대입니다”(1:2-6). 이 처음 14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다윗의 왕가가 시작이 될 때까지 다윗 왕조의 형성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형성기는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땅에 관한 축복이 현실적으로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동쪽 유프라테스 강과 서쪽 나일 강 유역을 제외하고 그 사이의 모든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습니다(15:18). 그 땅을 모두 차지하고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한 대왕이 바로 다윗입니다(삼하8:1-14).

참고로, 두 번째의 14대는 솔로몬 대왕 때부터 남조 유다 왕국이 망하기 직전에 승하한 여호야김 왕 때까지입니다(왕하24:6). 마태의 기록에서는 묘하게도 여호야김 왕의 이름을 빼고 있습니다(1:11-12). 두 번째의 14대는 다윗 왕조의 쇠퇴기를 말하며 동시에 남북 분열의 시대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의 14대는 나라가 망하고 신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간 비운의 왕 여호야긴의 이름을 여고냐로 언급하면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12, 1:2, 왕하25:27-30, 대상3:16-19). 그 시기에 있어서는 다윗 왕가의 이름이 그냥 다윗의 가문으로 바뀌게 되고 그들의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훗날을 도모하게 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 신분을 숨기고서 목수 요셉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한때 주전 6세기에는 여고냐의 손자 스룹바벨이 마지막 대제사장 스라야(왕하25:18-21)의 손자 예수아(3:2, 대상6:14-15)와 함께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의 호의로 일부 동족인 유민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축하게 되는 시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전 420년경 페르시아의 황제 아닥사스다가 승하하고 나자 유다 지파 느헤미야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의 권력은 레위 지파 대제사장 엘리아십에게 넘어가게 됩니다(13:28). 그 후 주전 2세기에는 제사장 마카비 가문이 독립에 앞장을 서게 되고 드디어 레위 지파의 왕조 하스모니안 시대가 전개됩니다. 이어서 이두매 출신 헤롯 왕가의 시대가 들어서게 되자 다윗의 가문은 득세하지를 못하고 계속 숨을 죽이면서 산골 나사렛에서 숨어 지내게 됩니다(2:16, 22-23).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려는 그들의 염원은 언제 성취가 될까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의붓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윗의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나타나자 다윗의 왕손들은 그 대단한 자부심인 혈통주의를(7:3)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고전15:7, 1:14). 그리고 만민구원을 부르짖으면서 초대교회의 장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앞장을 서게 됩니다(1:19). 그 흔적이 사도행전(15:13-21)과 야고보서(1:1) 그리고 유다서(1:1)에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윗의 왕손인 목수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의붓아들로 받아 들였으며 그의 뒤를 잇는 적통 야고보와 유다는 나사렛 예수를 새로운 유다의 왕 메시아로 모시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가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사도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 첫머리에 그 족보를 지루하게 싣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