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강(마1:1-전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5. 07:26

마태복음 강해 제1(1:1-전체)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8()

 

이 복음서의 저자를 사도 마태로 보고 있는 나름대로의 이유(1:1-전체)

 

세상에 가장 먼저 나타난 복음서는 마가복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장 간결한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16장에 불과합니다. 둘째, 고난과 영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시절 로마당국으로부터 철저하게 탄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힘을 주기 위하여 급히 저술이 된 복음서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엄청난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오른 쪽에 올림을 받게 되는 결과는 한 마디로 산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마가에 의하여 복음서가 세상에 나타나서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자 열두 사도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하겠습니다. 36개월동안 스승 예수님과 동거하며 공생애를 같이했던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적은 글을 세상에 발표하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교회개척의 일이 급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하는 복음전파와 발로 뛰는 선교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글로 적어서 모든 초대교회에 회람을 시킨다고 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점을 깨닫게 된 열두 사도 가운데 필을 들 수 있는 자가 몇 명 있습니다. 학문을 한 사람으로 보이는 사도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없는 사람으로 의사 누가가 적고 있기 때문에 제외가 됩니다(4:13). 그리고 일찍 순교한 사도 야고보도 제외가 됩니다(12:2). 머리가 비상했지만 스승을 배신한 가룟 유다도 제외가 됩니다(10:4, 13:26-27). 유다의 독립이 우선인 열심당원 시몬도 제외가 됩니다(6:15). 그렇다면 학문을 한 것으로 보이는 세리 마태(9:6), 유대경전에 밝은 가나출신 나다나엘(1:46-49), 입증하는 방법이 탁월했던 도마(20:25), 가문의 덕을 보고 있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10:3) 등이 복음서의 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 가나출신 나다나엘, 디두모라 하는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가운데 누가 이 복음서의 저자일까요? 마가복음을 증보하여 28장에 이르는 긴 글을 적을 수 있는 능력자가 누구일까요? 그 저자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서의 내용 가운데 네 사도에 대한 기록이 어떻게 삽입이 되어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10:3). 공식적으로 열두 사도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 곳에 그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기록은 마가복음(318), 누가복음(615)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4복음서를 통틀어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관련된 그 어떠한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이 복음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무척 낮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사회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아들의 이름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그 아버지가 저명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좋은 가문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학식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꼭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입장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부자인 선주 세베대의 아들들이지만 공부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18:15, 4:13). 물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사도 요한은 늘그막에 에베소 지역에서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뒤늦게 공부하여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을 저술하게 되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특이한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둘째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의 경우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경우와 대동소이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그 기록이 공식적인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는 곳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는 사도 요한의 절친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곳에서 그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1:16, 14:5, 20:24, 28, 21:2 등에 거명이 되고 있습니다. 친구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도마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서의 저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셋째로, 가나출신 나다나엘에 대한 기록은 이 복음서에서 아예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립과 바돌로매”(10:3)라고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빌립의 친구인 나다나엘이(1:45) 바로 바돌로매가 아닌가 추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요한복음에서 두 번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가나에서 처음 만나시는 장면입니다(1:45-49). 둘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갈릴리 출신 사도 8명 가운데 7명이 뭉쳐서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21:2). 그러므로 자신의 에피소드가 요한복음에 실려있는 나다나엘이 이 복음서의 저자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세리 마태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9:9-10).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 가운데 이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그의 동생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의 경우가 실리고 있습니다(4:18-22). 그 가운데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베드로와(8:14-17) 위와 같이 마태(9:9-10)입니다. 그 다음에 제10장 제3절에서 공식적으로 열두 사도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가운데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리 마태로 보입니다. 그가 이 복음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4복음서 가운데 오로지 이 복음서에서만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16:18, 18:17).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저자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저자는 조직의 질서를 따르며 그 권위에 복종을 하는 것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복음의 전파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였던 마태가 이 복음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진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이 복음서의 저자는 제일 첫 머리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윗 대왕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조상으로 등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첫마디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이 글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브라함의 신앙 및 다윗 대왕의 통치이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말과 글에 있어서 그 첫 마디가 맡고 있는 독특한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자나 청중의 시선을 그 첫마디가 잡아 끌고서 전체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지혜롭게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고 먼저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 조상이 되고 있는 야곱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첫 문장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왜 이스라엘의 이름을 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사상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선민사상과 대립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아들인 야곱 곧 이스라엘은 선민의 직계조상입니다. 유대교인들의 선민사상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뒤로 미루고 있으니 그것은 선민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복음서의 핵심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첫마디라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첫 단추를 제대로 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가장 처음에 말함으로 해서 이삭뿐만 아니라 기타 아브라함의 아들 7명 곧 서장자 이스마엘이나 후처 그두라의 소생 6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21:13-21, 25:1-6). 그들은 이스라엘의 친척이지만 선민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소외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그들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의 입장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첫 머리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재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그 동안 인위적으로 선민의 범주에서 배제가 되고 있었던 그들 모두가 구원의 대상으로 우선적인 관심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강변하고 있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문밖으로 내어쫓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1-12).

셋째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창세기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인류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22:12) 또는 선지자’(20:7)로 불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을 칭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 가운데서 천하만민에게 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나게 하겠다고 예언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22:18). 그 인물이 당장은 약속의 아들 이삭으로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다윗의 직계가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 부계의 족보로 따진다면 그 누구의 혈통도 아닙니다. 다만 다윗 대왕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의붓아들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1:18-25). 그렇지만 모계로 따지게 되면 그 신분이 대단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혈손이기 때문입니다(1:5, 36).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메시아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섯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장 존경하고 있는 왕이 다윗 대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다윗 대왕만큼 영토를 확장하고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을 온 중동지역에 떨친 영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대왕의 혈통에서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해줄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새의 줄기에서”(11:1)라고만 언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이라고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새는 아들이 8명이나 됩니다(삼상16:5-13).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일 가능성이 15%도 되지를 못하는데 왜 그렇게 속단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다윗 대왕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 대신에 그들에게서 다른 것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사상과 선지자적인 삶의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대왕의 왕권과 그의 통치이념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대왕의 통치이념은 한 마디로, 제국의 왕좌를 얻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는 10년 이상 사울 왕에게 쫓기어서 도망자 신세였지만 결코 사울 왕의 목숨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취하지 아니한 인물입니다(삼상24:6-7, 26:9-12). 왜냐하면, 그가 세우려는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방법에 따라서만 건설이 되는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결론은 제28장 끝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권보다 더 큰 천하의 권세를 나 메시아가 얻었으니 이제 제자인 너희들은 온 세상사람들에게 나의 복음을 전하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하도록 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방법이다”(28:18-20).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자녀로서의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1:9-12). 결코 혈통이나 육체적인 관계 또는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1:13). 그 점을 저자 마태는 그의 복음서 제일 첫머리에서 위와 같이 약간 다른 방법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