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제143강(출35:1-39: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10월 17일(금)
왜 똑 같은 내용이 지루하게 반복이 되고 있는가?(출23:10-19, 25:1-31:17, 35:1-39:31)
출애굽기 가운데 지루한 내용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크게 보아 두 번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제25장에서 제31장 사이에 아주 세밀하게 마치 설계도면을 설명하듯이 그렇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루한 내용이 또다시 제35장부터 제 39장 사이에 마치 복사본처럼 또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한번만 기록을 해놓으면 그 내용을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보면 될 터인데 왜 똑 같은 이야기를 그렇게 두 번이나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세가 우매한 사람이 아닌데 왜 그렇게 적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기록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하시고 있으니 그 의도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은 그보다 더 심합니다. 그것은 두 번이 아니라 무려 세 번 이상 반복적으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출12:1-28, 43-50, 13:1-16, 23:10-19, 31:12-17, 34:18-24, 35:1-3, 레23:1-44).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어도 네 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귀담아 듣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실제로 그 말씀대로 징계를 하시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상태입니다. 셋째, 머리에 기억을 시킬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는 심장에 새겨 넣기 위함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설명을 해주신 꼭 그대로 완성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한번 설명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존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백성들은 만사를 제쳐두고서 그 시행에 만전을 기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쉽게 잊어버리고서 제멋대로 해석을 하여서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생명과 사망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모두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30:19).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써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선택하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신3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설명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는데(출22:20) 실제로 죽이는지 않는지 백성들은 그것을 지켜보자고 합니다. 어떡합니까? 실제로 시범적으로 극소수를 죽이고서 그 다음에는 똑 같은 내용을 또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출32:28, 35:1-3).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출32:1-6).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조리 진멸을 해버리겠다고 크게 노하십니다(출32:8-10). 모세가 중재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삼천 명의 죽음으로 전멸을 피하고자 합니다(출32:28, 34:9). 그 다음에 똑 같은 내용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출34:10-35:3).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처음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또는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열심히 기억하여 실천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생각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며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방법론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사55:8-9). 따라서 창조주를 모시고 사는 피조물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종된 입장이며 청지기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 법도를 벗어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한 대로만 해석을 하고 또 그렇게 실천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모법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하위규정을 버젓이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좋다고 시행을 하고 있습니다(출21:2, 레25:39-41). 또는 예외규정을 만들어 놓고서 그 구멍으로 줄줄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막7:11-13, 10:4). 한 마디로, 지키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질책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8-9),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하므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3-9).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같은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두 번 세 번 반복을 하여 강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에서 백성들이 이탈을 하지 아니하도록 방지를 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의 기술은 전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사항입니다(출25:1-31:11). 그러나 나중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었다는 자랑스러운 보고사항입니다(출35:4-39:42)”. 그 결과 모세가 기뻐하면서 백성들에게 축복을 행하고 있습니다(출39:43).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하신 그대로 성막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였으니 스스로 생각을 해도 대견합니다. 그 자랑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바로 똑 같은 내용을 두 번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의 기술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막을 짓도록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의 기술은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바쳤으며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된 일꾼들이 말씀하신 꼭 그대로 성막의 건설을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손으로 기록하고 동시에 머리에 기억을 시켜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에서 일단 이해가 된 다음에는 입으로 고백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지막 순서는 입으로 이웃에 전파하며 자신의 삶으로써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이웃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13:9-10). 머리에 한번 기억을 시킨 다음에는 말씀과 현실 사이에 어긋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한 전파하기 위해서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말씀의 성취가 필요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말씀은 다시 한번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쉽게 이해를 하자면, 먼저는 머리에 기억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슴에 새겨주는 방법입니다. 참고로, 성령님의 역사도 그러하다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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