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39강(출34: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6. 00:56

출애굽기 강해 제139(34: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013()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백성들이 당하게 되는 불이익(34:1-3)

 

그 불이익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산 근처에 아예 접근조차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34:3a). 둘째, 모세가 자기 손으로 두 개의 돌판을 만들어 산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34:1a, 2).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산을 바라보면서 시내 광야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19:1-2). 애초에 그들은 산 아래까지 접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산 기슭의 경계선을 침범하지만 아니하면 얼마든지 가축에게 풀을 먹일 수도 있었습니다(19:23).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그룹인 70인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서 산 정상 가까이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특권까지 한 차례 누린 적이 있습니다(24:9-11). 하지만 그 모든 혜택이 이제는 옛날 일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십계명을 함부로 어기고 제멋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섬겼기 때문입니다(32:1-6). 그러므로 비록 아무 것도 모르는 가축이라고 하더라도 멋모르고 시내 산 가까이 접근을 하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34:3b).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척살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19:12, 21).

이제는 얼마나 엄격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되시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강직하게 만든 것은 목이 뻣뻣한 백성들의 안일한 사고방식과 외람된 행동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32:9, 33:5). 그러므로 일단 하나님의 불편하신 심기가 드러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잘 알아서 처신을 해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에 비추어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겠습니다(17:1).

둘째로, 모세가 스스로 두 돌판을 다듬어서 그것을 가지고 산 위로 올라가야만 합니다(34:1-2).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두 돌판에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새겨서(24:12) 모세에게 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돌판까지 직접 다듬어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32:15-16). 그런데 그 두 돌판을 지니고 하산을 한 모세가 그만 화가 나서 백성들 앞에 그것을 내던져서 깨어버리고 말았습니다(32:19). 모세의 그러한 행동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혈기가 방자한 모세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감히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신성한 돌판을 그렇게 던져서 깨버리는 것은 정말 불경스러운 처사입니다.

경솔하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 돌판을 내던져서 깨뜨려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을 내던져버리는 행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1:3, 1:1-3). 그런데 모세는 그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있는 모세를 어떻게 교육을 시키면 좋을까요? 그리고 그 처벌이 무엇일까요? 그 해답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모세 스스로 돌판 두 개를 깎아 다듬고 만들어서 하나님의 산으로 직접 가지고 올라오도록 만든 것입니다(34:1-2). 그리고 그 두 돌판에는 이제 많은 율법과 계명을 새겨주지를 않습니다(24:12). 그저 십계명만 간단하게 새겨서 가지고 내려가도록 조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34:28-29). 요컨대, 하나님 앞에 혈기를 부리고 있는 종에게는 많은 말씀의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이익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산으로 다시 나아가는 모세에게 선포되고 있는 두려우신 하나님의 말씀(34:4-9)

 

자신의 경솔한 행위를 모세가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돌판 두 개를 만들어서 아침 일찍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34:4).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시고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를 만나시고자 시내 산 정상에 강림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34:5). 만약 모세가 돌판도 만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 앞에 완악하여 목을 뻣뻣이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거나 다시 그를 만나주지를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잠잠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말씀대로 그대로 실천을 했기에 그 모습을 지켜보시고서 하나님께서 다시 시내 산에 강림을 하시고 모세와 말씀을 나누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태도와 말씀이 전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시내 산 정상에 모세와 함께 서 계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신의 본체와 신위를 드러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34:5). 엄청난 영적인 실체가 순식간에 모세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34:6). 육체를 가지고 있는 모세는 죽음과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5:8). 그래서 땅에 납작 엎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34:8).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34:6-7).

그 의미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이번 한번은 화를 참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들과 세운 언약의 진실에 입각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그러나 그 용서는 그들의 행실을 고치는 처벌까지 면제를 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자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언약에 충실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광야생활과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오랜 기간 고난의 세월이 있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선포를 듣고서 모세는 두 가지를 다시 간청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디 목이 뻣뻣한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아달라는 간구입니다(34:9b). 둘째,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마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을 해달라는 간청입니다(34:9a). 그 의미는 비단 광야생활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고 구원과 영생을 베풀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히브리서 저자의 해석과 같이 모세의 신앙이 이 땅에서 돌아갈 수 있는 약속의 땅과 선조들의 고향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11:15). 그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믿음의 조상들이 꿈꾸고 있던 영생의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11:14, 16). 그 소망을 모세가 피력하고 있기에 이 대목이 성경에 기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게 되는 메시아를 이미 모세가 앙망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11:26). 결론적으로, 모세의 기록이 그와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증언을 하시고 있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