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38강(출33:14-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5. 10:51

출애굽기 강해 제138(33:14-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012(주일저녁)

 

주님의 영광이 빛나는 경우(33:14-23)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 가운데 주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33:14a). 흔히 인생길을 자기 혼자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반드시 동반자가 있습니다. 함께 인생길을 가고 있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반자나 동료가 누구일까요? 물론 동료보다는 동반자가 더 중요합니다. 동료는 함께 과업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따름입니다. 그러나 동반자는 과업뿐만 아니라 일상사를 함께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도움이 되는 동반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은 동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다음과 같이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주님과 같은 멍에를 메고서 한 겨리로 인생의 밭을 갈고 있는 자는 힘이 적게 듭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힘이 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님과 발걸음을 같이하여 보조를 맞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되면 주님께 부탁을 드리면 됩니다. 어차피 그 문제는 성도 자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큰 문제는 주님께서 전부 처리를 해주십니다. 성도들은 좋으신 주님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힘에 맞도록 맡겨진 작은 일들만 처리를 하면 됩니다. 만약 자신이 전부 도맡아서 처리를 하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도 결코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33:14). 이제부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는 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드러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실 때에 주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33:17).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여섯째 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1:26-27). 그들에게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축복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1:28).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2장에서 사람의 이름 하나가 최초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아담입니다(2:19-25). 창조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고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친근하게 그 이름을 불러주고 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실 때에 그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비쳐오고 있습니다(3:9).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아니하시고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고 계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죽은 인생을 살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약육강식의 육체적인 삶만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6:2-5).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의 이름으로 긍휼을 베풀 때에 주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33:19).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15:1-21). 하지만 광야 길에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곧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15:22-16:3).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출애굽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적인 잘못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정반대로 행동을 하는 자입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곧 다시 그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어주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숙한 신앙인에게 하나님의 역사로 영광된 미래가 펼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성숙한 성도들에 의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5). 그것은 무차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은 차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아와 과부같이 고대의 가부장사회에서 재산을 가질 수 없는 자들 또는 거처가 없이 떠돌고 있는 나그네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모두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주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 계시는 것입니다(33:19)

넷째로, 장차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살 때에 주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33:20).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피조물은 전부 죽게 됩니다. 그 말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광채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서는 태양과 달이 사라지고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광채가 모든 것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21:23, 22:5).

그 광채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21:27, 22:3-4). 성도들이 부활하여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 설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살아 생전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17:21-24, 8:8-16).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이 그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인생 가운데 그 능력이 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반석 위에 서서 가리움을 받게 될 때에 주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33:21-23).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성도에게 임재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14:26, 16:13-15). 그 은혜가 베드로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16)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그 이름이 반석을 의미하는 게바로 바뀌고 있습니다(16:18).

그렇게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보호를 해주십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은 그 진면목을 함부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보는 즉시 모세가 죽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반석 틈에 그를 숨겨두고서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그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만을 볼 수 있도록 가려주고 있습니다(33:22-23). 그것은 마치 죄악을 가리워주고 있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같습니다. 그 사실을 다윗이 다음과 같이 오래 전에 이미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